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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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 북위 49° 45′ 동경 6° 10′ / 북위 49.750° 동경 6.167° / 49.750; 6.167

룩셈부르크 대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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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언어
Flag of Luxembourg.svg Great coat of arms of Luxembourg.svg
국기 국장
표어 Mir wëlle bleiwe wat mir sinn
(우리는 현재의 우리로서 남기를 원한다.)
국가 우리 나라
Luxembourg on the globe (Europe centered).svg
수도 룩셈부르크 북위 49° 36′ 42″ 동경 6° 07′ 48″ / 북위 49.611667° 동경 6.1300° / 49.611667; 6.1300
정치
공용어 룩셈부르크어, 프랑스어, 독일어
정치체제 군주제, 입헌제, 민주제, 단일제, 내각제
대공 앙리
총리 그자비에 베텔
역사
독립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 동군연합 해체 1867년 5월 11일
지리
면적 2,586km2 (167 위)
내수면 비율 0.6%
시간대 CET (UTC+1)
DST CEST (UTC+2)
인구
2015년 어림 549,700명 (171위)
인구 밀도 171명/km2 (45위)
경제
GDP(PPP) 2014년 어림값
 • 전체 $506.5억 (95위)
 • 일인당 $92,506 (1위)
HDI 0.875 (26위, 2012년 조사)
통화 유로1 (EUR)
기타
ISO 3166-1 442, LU, LUX
도메인 .lu
국제 전화 +352

11999년까지는 프랑.

룩셈부르크 대공국(룩셈부르크어: Groussherzogtum Lëtzebuerg 그로스헤르촉툼 러처부어시, 프랑스어: Grand-Duché de Luxembourg 그랑뒤셰 드 뤽상부르[*], 독일어: Großherzogtum Luxemburg 그로스헤르촉툼 룩셈부르크[*]), 약칭 룩셈부르크(룩셈부르크어: Lëtzebuerg 러처부어시, 프랑스어: Luxembourg 뤽상부르[*], 독일어: Luxemburg 룩셈부르크[*])는 서유럽에 위치한 국가이며 대공이 통치하는 대공국이다. 수도는 룩셈부르크이다. 룩셈부르크는 세계에서 국민 소득이 높은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세계 최대의 철강 업체 아르셀로미탈의 본사가 룩셈부르크에 위치해 있다.

유럽 연합, 경제협력개발기구, 유엔, 북대서양 조약 기구, 베네룩스 경제 연합의 창립 회원국이며, 수도 룩셈부르크에는 유럽 연합의 여러 기관이 위치하고 있다. 2013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이사국으로 선출되어, 2014년에 임기를 마쳤다.[1] 2016년 기준 룩셈부르크 여권 소지자가 무비자 혹은 도착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국가는 187개국이며, 이는 전세계 15위에 해당한다.[2]

역사[편집]

  • 963년 아르덴 백작 지크프리트가 룩셈부르크의 고성을 거점으로 삼아 이 지역의 지배를 시작한다.
  • 1060년경 지크프리트의 증손인 콘라트가 처음으로 룩셈부르크 백작을 칭한다.
  • 콘라트의 증손인 에르메진데의 시절에는 영토는 3배로 팽창해 왈롱 지방도 병합된다.
  • 1308년 에르메진데의 증손인 하인리히 7세가 신성로마 황제로 추대된다.
  • 1354년 하인리히 7세의 손자인 황제 카를 4세가 룩셈부르크를 공국으로 승격시킨다.
  • 1443년 부르고뉴 공국의 필리프 2세가 룩셈부르크를 구매하다.
  • 1477년 샤를 7세의 후계자 마리가 후의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는 것으로, 룩셈부르크는 합스부르크가에 넘어간다.
  • 1556년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의 영지가 된다.
  • 1659년 피레네 조약에 의해 남부지역이 프랑스에 할양된다.
  • 1684년 프랑스에 병합된다.
  • 1697년 라이스바이크 조약에 의해 에스파냐에 반환된다.
  • 1714년 라슈타트·바덴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령이 된다.
  • 1794년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 1815년 빈 회의에 의해 대공국으로 승격되었으며, 네덜란드 국왕이 대공 작위를 겸했다.
  • 1839년 런던회의에 의해 서쪽 영토 절반을 벨기에에 할양하다.
  • 1842년 프로이센 주도의 관세동맹에 가입하다.
  • 1867년 런던 조약으로 프로이센군이 철수하고 독립과 중립이 보장되다.
  • 1890년 대공을 겸한 네덜란드 국왕 빌렘 3세의 죽음에 의해 나사우-바일부르크가의 아돌프가 대공이 되고 동군연합은 해소된다.

정치[편집]

지리[편집]

독일, 프랑스, 벨기에 사이에 있는 내륙국가로 독일프랑스완충국으로서의 의미도 지녔다.

행정 구역[편집]

수도룩셈부르크이다. 룩셈부르크는 3개 구와 12개 주, 116개 지방 자치체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 구역 목록[편집]

다음은 룩셈부르크의 행정 구역 목록이다.

경제[편집]

Luxembourg city 2007 10.JPG
룩셈부르크의 교회
도시 전경
룩셈부르크 전경
룩셈부르크의 한 은행
Lintgen 소방서

전통적으로 협소한 국토 때문에 이웃 나라와 유대를 굳게 하여 1843년부터 1918년에 독일과 관세 동맹을 맺고, 1921년 이후 벨기에-룩셈부르크 경제동맹, 1944년 베네룩스 경제동맹,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 등에 가맹함으로써 소국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있다. 프랑스와 국경을 따라 발달한 철강산업은 룩셈부르크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철강산업은 무역액의 29%, 국내총생산(GDP)의 1.8%, 산업고용의 22%, 노동력의 3.9%를 차지한다.

남부의 구틀란트를 중심으로 농업이 이루어져 감자, 보리, 사탕무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독일 국경을 따라 흐르는 모젤 강 연안의 포도원에서 생산하는 포도주는 특히 유명하다. 이 나라 제1의 산업인 광공업은 남서부의 뒤들랑주, 로딩겐, 에슈쉬르알제트, 디페르당주 등지에서 산출되는 철광석을 원료로 하였으나, 철광석층의 대부분이 고갈되어 프랑스의 수입에 의존한다.

이밖에 화학제품·금속제품·시멘트를 생산하며, 맥주, 담배, 낙농제품의 제조도 성하다. 그러나 석유파동 이래 세계적 경제의 혼미는 룩셈부르크의 철강업에도 큰 영향을 끼쳐 정부는 경제적 부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외국기업유치에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자국(自國)을 금융시장으로 부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재 룩셈부르크는 은행·보험업, 철강업을 기간산업으로 하는 서비스산업국이자 공업국으로 실업률유럽 연합 국가 중 최저이며, 1인당 국내총생산은 세계 최고수준이다. 1998년 이후에도 제조업의 수출증가나 금융업의 호조에 의해 고성장을 유지하였다.

무역면에서는 1998년 수출 208억 달러, 수입 174억 달러이며, 주요 수출품은 금속, 기계, 전기제품, 플라스틱, 고무, 섬유 등이고 수입품은 기계류, 전기제품, 금속, 수송용 기기, 광산물품(석유 포함) 등이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독일, 프랑스, 벨기에, 영국, 네덜란드 등이다.

주민[편집]

게르만족이 바탕이 되고 프랑스인과의 혼혈이 있다. 포르투갈인과 이탈리아인들이 소수로 살고 있는 데, 이들은 룩셈부르크의 철강 산업의 붐이 일어날 때 노동자로 들어왔다.

언어[편집]

헌법상의 명시적 조항은 없고, 룩셈부르크어(이 언어는 독일어의 방언으로 규정한다), 프랑스어, 독일어가 사실상의 공용어이다. 입법활동은 프랑스어가 독점하고, 행정 및 사법분야는 3개 언어를 사용한다. 전국민의 97%가 익숙한 프랑스어이기에,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영어도 관광 장소에서 사용한다.

종교[편집]

국교는 없고, 주민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에 속해 있다. 그러나 세속화 경향이 심하고, 외국인의 유입이 많아 무신론자나 이웃 종교 신도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개신교, 유대교, 정교회, 성공회, 이슬람교 등의 신자가 있다.

문화[편집]

대한관계[편집]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 참전국으로 UN군으로 참전하여 44명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1961년 대한민국과 수교하였으며 해운협정(1987년)과 항공협정(2003년)을 체결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2001년 수교하였다. 2016년 현재, 별도의 한국대사관이 존재하지 않고 주 벨기에 대사관에서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1. “Luxemburger Wort – Asselborn's final Security Council meeting”. Wort.lu. 2014년 12월 19일. 2018년 7월 4일에 확인함. 
  2. “Global Ranking – Visa Restriction Index 2016” (PDF). Henley & Partners. 2018년 7월 4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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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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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게 왕국
보크몰: Kongeriket Norge
뉘노르스크: Kongeriket Noreg
Flag of Norway.svg Coat of arms of Norway.svg
국기 국장
표어 Alt for Norge
(노르웨이어: 모두 노르웨이를 위하여)
국가 그래, 우린 이 땅을 사랑한다
Norway on the globe (Europe centered).svg
수도 오슬로 북위 59° 56′ 58″ 동경 10° 45′ 23″ / 북위 59.949444° 동경 10.756389° / 59.949444; 10.756389
정치
공용어 노르웨이어
정치체제 군주제, 입헌제, 민주제, 의원내각제
국왕
총리
하랄 5세
에르나 솔베르그
역사
독립 스웨덴에서 독립
 • 독립 1905년 10월 26일
지리
면적 324,220km2 (68 위)
내수면 비율 6.0%
시간대 UTC+1 (UTC1)
DST UTC+2
인구
2015년 어림 5,165,802명 (117위)
인구 밀도 14명/km2 (166위)
경제
GDP(PPP) 2012년 어림값
 • 전체 $2,817억 (44위)
 • 일인당 $55,009 (4위)
HDI 0.955 (1위, 2012년 조사)
통화 크로네 (NOK)
기타
ISO 3166-1 578, NO, NOR
도메인 .no
국제 전화 +47

노르웨이 왕국(보크몰: Kongeriket Norge 콩에리케 노르게[*], 뉘노르스크: Kongeriket Noreg 콩에리케 노레그[*]), 약칭 노르웨이(보크몰: Norge 노르게[*], 뉘노르스크: Noreg 노레그[*])는 북유럽(Northern Europe)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나라다. 수도는 오슬로며, 공용어는 노르웨이어다. 주력 산업은 어업, 석유산업 및 서비스업이다.

개요[편집]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서쪽 부분, 얀마옌 섬, 스발바르 제도, 그리고 부베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385,207[1] km²이며 인구는 약 490만명 정도이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인구밀도가 작은 나라다. 나라의 대부분이 동쪽의 스웨덴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노르웨이의 북쪽지역은 남쪽은 핀란드, 동쪽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남쪽의 스카게라크 해협의 건너편에는 덴마크가 있다. 수도오슬로다. 북극해바렌츠 해와 접하고 있는 해안선은 피오르로 유명하다. 특히 이 나라는 인구가 200명인 도시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노르웨이는 석유, 천연 가스, 석탄, 목재, 해산물 등이 풍부하며, 지형을 이용한 대량의 수력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원 매장량은 엄청나 2011년 기준으로 세계 3위의 천연가스, 5위의 석유 수출국이기도 하며, 관련 산업이 GDP의 25%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자원에 힘입은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세계에서 제일 크며, 규모는 현재 한화 650조에 달한다. 세계 주식시장의 1%를 보유하고 있다.[2] 무역은 항상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2011년 기준으로 흑자 규모는 한국의 2배에 달한다.[3] 석유가 발견되기 전인 1970년에는 스웨덴의 총 경제규모의 1/3밖에 되지 않았으나 결국 자원에 힘입어 2009년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가 2배에 달하는 옛 종주국 스웨덴을 총 경제력마저 추월하였다.[4] 정치적으로 노르웨이는 입헌 군주제이며, 국가 원수하랄 5세이다. 노르웨이는 유럽 연합의 회원국은 아니나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고, 또한 미국의 대표적 우방국 중 하나이다. 노르웨이는 유엔에 경제적으로 가장 크게 공헌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며, UN군에도 참여하여, 특히 아프가니스탄, 코소보, 수단, 리비아 등에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유엔, NATO, 유럽 평의회, 북유럽 이사회의 창립국 중 하나이며, 유럽 경제 지역, WTO, OECD의 멤버이자 솅겐 조약에 서명한 국가 중 하나이다.

2001년부터 2006년, 그리고 2009년부터 가장 최근의 통계까지 노르웨이는 인간 개발 지수에서 세계 정상을 기록한 대표적 선진국이다. 2010년 기준으로 연간 근로시간은 약 1,400시간으로 주당 27시간 정도이며 세계에서 가장 적게 일하는 국민 중 하나다. 최저임금은 산업마다 다르나 연간 310,000크로네(약 6,100만원)정도며, 2010년 기준으로 대졸자 초봉 평균은 420,000크로네다.[5][6]

자연 환경[편집]

노르웨이의 호수.

지리[편집]

노르웨이는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서쪽 지방이다. 남북으로는 약 1,700km로 길게 뻗쳐 있으나 동서는 가늘며, 가장 좁은 곳이 몇 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특이한 모양이다. 국토의 72%는 빙하의 침식을 받은 평탄한 꼭대기를 지닌 산지이다. 삼림이 24%를 차지하며 경지는 매우 적다. 해발 2,000m 이상에는 만년설이나 빙하가 지금도 남아 있다. 스칸디나비아 산맥은 북부·중부에서는 스웨덴과의 국경으로 되어 있으나, 남부는 노르웨이 안에 펼쳐져 있으며, 이곳이 가장 높고요텐헤임(2,452m) 폭도 가장 넓다. 곧 요텐헤임(2,452m), 요스테달스브렌(2,083m) 및 도브레페르(2,286m) 등의 산이 있고 빙모(氷帽)와 빙하가 있다. 서해안은 거대한 피오르드 지형이 나타나는데 인근에 5만 개 이상의 섬이 있고 2,500 km 이상이 이에 해당한다.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2,542km의 국경을 접하며 동쪽으로는 핀란드러시아가 있다. 남서쪽으로는 노르웨이 해, 북해가 있다. 남쪽 덴마크와의 사이는 스카게라크 해협이라고 부른다. 북쪽에는 로포텐 제도, 베스텔롤렌 제도 등이 있어서 좋은 어장으로 되어 있다.[7] 노르웨이는 대부분이 상당히 높은 지대여서 자연 경관이 수려하고 선사 시대 이후의 빙하 지형이 남아 있기도 하다. 베르겐의 북쪽에 있는 송네 피오르는 안쪽까지의 길이가 200km나 되며, 100km까지도 나비가 몇 킬로미터나 된다. 이 피오르는 양쪽 육지가 가파른 절벽이며, 물 깊이는 깊을 뿐만 아니라 경치가 좋다.[8]

기후[편집]

기후는 한대성 기후이다. 한대성 기후이기 때문에 12월에는 오후 3시만 되어도 일몰하고 기온은 -15℃ 이하이다. 하지만 내륙으로 들어가면 겨울 기온이 떨어지고 강우량이 적다. 눈이 자주 오는 편이며, 북극처럼 백야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난류인 멕시코 만류(灣流)가 서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흐르므로, 높은 위도에 비하면 온도가 낮지 않고 강우량이 많다. 예를 들면 남부 서해안의 베르겐은 겨울의 월평균 기온이 1.3∼1.5℃ 이며, 여름에는 약 15℃ , 위도에 비하여 비가 많이 오는 편이다. 1년 강우량은 1,900mm에 이른다. 북쪽일수록 강우량은 적어져 북부에서는 연강우량이 400mm 이하이다.[9]

역사[편집]

노르웨이의 역사[편집]

선사 시대[편집]

현재의 노르웨이 땅에 사람이 거주한 흔적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내륙빙하가 녹기 시작한 선사시대이다. 1만년 전 오늘날 노르웨이인들의 조상은 순록을 비롯한 동물들을 사냥하며 북쪽으로 전진했다. 인류 활동의 가장 오래된 증거는 외스트폴주의 남동쪽에 위치한 언덕에서 발견되었다.

바이킹 시대[편집]

9세기에서 11세기까지 노르웨이의 바이킹(영어: Viking)은 대대적인 해상원정을 벌였다. 노르웨이인의 후손이 아이슬란드에 뿌리를 내렸고 한때는 지금의 캐나다의 일부까지 이르렀다. 1000년 무렵 바이킹은 그린란드와 미국을 발견하였고, 기독교가 노르웨이에 들어갔다. 노르웨이 농민의 작은 집단이 차차 큰 정치적·군사적 지역으로 모였다. 1164년 최초의 국왕을 맞이했고, 10세기하랄 1세가 등장하여 국가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1015년 올라프 2세 성왕이 노르웨이 전체를 완전히 통일하고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근세[편집]

2세기에 걸친 바이킹의 습격은, 994년 왕이었던 올라프 1세기독교를 승인한 이후로 점차 줄어들었다. 13세기, 내전이 끝나고, 노르웨이의 영향력은 브리튼 제도아이슬란드, 그린란드까지 뻗어져 나갔다. 12세기에 접어들자 왕위를 둘러싼 내부항쟁이 벌어졌다. 1217∼1263년에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지배하여 노르웨이의 국력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문화적으로도 개화를 한 시대였다. 그 뒤 스웨덴과 동맹, 한자(Hansa) 상인(商人)의 활약에 의한 노르웨이의 경제의 쇠퇴, 덴마크와의 400년 이상에 걸친 동맹 등의 시대가 있었다. 더구나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전란의 시대를 걸쳐서 새로운 시대에 들어갔다. 1217년 호콘 4세가 즉위하여 내란을 점차 평정하고 절대 왕정의 기반을 닦았다. 1397년, 노르웨이는 덴마크-노르웨이에 흡수되었고, 이는 4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1397년 포메른의 에리크 3세가 노르웨이 왕으로 즉위함과 동시에 덴마크스웨덴의 왕도 겸하였다. 그는 1442년 폐위되었으나 이후로도 오래도록 덴마크 왕의 지배가 계속되었고, 종교개혁운동으로 1539년 크리스티안 3세는 노르웨이를 루터교로 개종시켰는데, 현재도 노르웨이 기독교인들의 거의 대부분이 루터교 신자들이다.

이민시대[편집]

킬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가 덴마크에게 독립한 후인 1814년, 노르웨이인들은 노르웨이가 스웨덴에 할양되는 것에 반대했고, 노르웨이 왕국 (1814년)을 수립하고 새로운 헌법인 노르웨이 헌법을 채택했다. 이러한 노르웨이에 대항하여 스웨덴은 노르웨이와 전쟁을 했고, 결국 노르웨이가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에 들어와 스웨덴의 왕이었던 카를 14세를 섬기는 대신, 노르웨이의 독자적인 헌법을 유지시켜 주기로 합의했다. 19세기 내내 일어난 노르웨이의 독립에 대한 움직임은, 결국 1905년 노르웨이의 독립을 일구어 내고, 스웨덴-노르웨이연합의 종결을 이끌어냈다. 1866년에서 1873년에 이르기까지는 제1기의 대규모 이민시대로서 미국에 약 10만 명, 그리고 1900∼1910년 제2기의 대규모 이민시대로서 20만 명이 바다를 건너갔다. 비록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노르웨이는 중립국으로 남았지만, 전쟁 중에 많은 선박들이 파괴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노르웨이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에 의해 5년동안 점령당했다. 이때 독일에 협조했던 나치비드쿤 크비슬링은 전후에 반역죄총살당했다.[10] 인류학자 헤이에르달은 노르웨이가 나치독일의 지배를 받을 때에 저항운동을 했다. 기행문 《콘티키》(학원출판공사에서 한국어 책을 펴냄)에 따르면 헤이에르달은 자신을 잡으러 온 나치독일군과 권총으로 총격을 벌이면서 몸을 피했다고 한다.

1949년, 노르웨이는 중립을 끝내고 NATO의 창립멤버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인근 바다에서 석유와 천연가스가 발견된 뒤로, 노르웨이의 경제 발전이 가속화되었다. 1972년과 1994년, 유럽 연합 가입 총선거가 치러졌지만, 두 번 모두 가입이 무산되었다.

2011년에는 극우 인종주의자에 의한 2011년 노르웨이 테러가 일어났다. 이 일은 노르웨이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라고 한다.

정치[편집]

1814년 헌법에 의해서 노르웨이의 기초가 섰으며, 의원내각제로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49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맹하였고, 충실한 사회보장제도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11]

대외 관계[편집]

대한민국 대한민국

1959년 대한민국과 수교하였으며 한국전쟁때는 UN군으로 참전하여 야전병원 등의 의료지원을 하였다. 노르웨이는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였고, 한국은 1994년 동계 올림픽릴레함메르로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노르웨이를 방문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63년에 수교하였다.

스웨덴 스웨덴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이웃국으로서 관계가 깊으며, 역사적으로 스웨덴이 노르웨이를 점령해서 반감정이 있기도 하나, 지금은 같은 서방 일원으로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행정 구역[편집]

노르웨이의 행정 구역은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노르웨이의 주
번호 주 이름 청사 소재지 면적 (km²) 인구 (명)
1 외스트폴주 사릅스보르그 4,182 262,523
2 아케르스후스주 오슬로 4,918 509,177
3 오슬로 - 454 548,617
4 헤드마르크주 하마르 27,397 188,692
5 오플란주 릴레함메르 25,192 183,037
6 부스케루주 드람멘 14,910 247,655
7 베스트폴주 퇸스베르그 2,224 223,804
8 텔레마르크주 시엔 15,299 166,170
9 에우스트아그데르주 아렌달 9,157 104,759
10 베스트아그데르주 크리스티안산 7,276 163,702
11 로갈란주 스타방에르 9,378 404,566
12 호르달란주 베르겐 15,460 456,711
13 송노피오라네주 레이캉에르 18,623 106,194
14 뫼레오그롬스달주 몰데 15,121 245,385
15 쇠르트뢰넬라그주 트론헤임 18,848 278,836
16 노르트뢰넬라그주 스테인셰르 22,412 129,069
17 노를란주 보되 38,456 235,436
18 트롬스주 트롬쇠 25,877 154,136
19 핀마르크주 바드쇠 48,618 72,665
20 스발바르 제도 롱위에아르뷔엔 61,020 2,800

경제[편집]

전 국토의 겨우 3% 정도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며 산업인구의 11.9%가 제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따라서 식량은 자급자족이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어업은 활발하여 대구·청어·정어리 등의 어획고는 세계 수위를 다툰다. 이 나라에서 발달한 원양 포경업은 최근에는 쇠퇴해 버렸지만, 북부 르흐딘에 포경기지가 있다. 1971년부터 북해 유전이 개발되어 1975년 산유국 대열에 진입하였으며 수력발전과 어류 및 산림·광물자원이 풍부하다. 이 나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외국 무역을 높이는 방법 이외에는 없으며, 현재 세계에서 제7위의 무역액을 보여주고 있다. 노르웨이의 상선보유는 세계 제4위로서 세계 제9위의 해운 수입을 올리고 있어 이 나라의 수입 초과에 대한 큰 뒷받침이 되고 있다.[12]

국민소득[편집]

노르웨이는 석유가 발견되기 전인 1970년 이전엔 그다지 부유한 나라가 아니었다. 스웨덴이 1960-70년대에는 노르웨이보다 월등히 부유했으나 이제는 역전되어 스웨덴 크로나노르웨이 크로네의 환율에 비해 약 85% 수준이고, 많은 스웨덴 젊은이를 포함한 스웨덴 인들이 노르웨이에 일자리를 찾아 들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2014년 10만달러까지 치솟았으나, 2015년부터 저유가시대 때문에 떨어졌다. 2016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약 69,700$이다.

자원[편집]

노르웨이의 주 수출품의 45%가 원유와 가스이고, 이것들이 20% 이상의 GDP를 차지한다. 세계 4번째 원유 수출국이자, 세계 3번째 가스 수출국이다. 또한, 노르웨이는 중국에 이어 세계 어획량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수산업[편집]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어획량을 가진 나라들 중의 하나이다. 연어청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수산물이다.

무역[편집]

국민 1인당의 수출입액은 베네룩스 다음가는 세계의 정상급에 속하고 있다.[11]

교통[편집]

국내 교통은 육상·해상 양면에 있어서 이 나라 지형이 남북으로 길 뿐 아니라 산과 피오르드의 장애 때문에 운송에 많은 비용이 들게 된다. 철도(태반이 국영임)의 건설은 의욕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나 역시 수상 교통의 역할이 크며, 이 나라의 대도시는 항구를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 또 서해안을 따라 북부까지 도시가 있는데, 함메르페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도시로서 무역의 중심이며, 특히 어획물의 거래가 성하다. 스웨덴의 키루나 등지에서 나는 철광석은 나르비크항을 통해 수출된다. 나르비크는 1880년대에 철도가 시설된 당시에는 인구가 겨우 50명이었으나, 100여년 동안에 약 1만 9,000명의 도시가 되었다.[13]

사회[편집]

인구[편집]

노르웨이 주민은 금발과 파란눈을 지니며 키가 큰 사람이 많다. 또한 장수(長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균 수명은 남자는 73.6세이며, 여자는 80.3세이다. 그리고 랩(Lapp)족은 북부 노르웨이에만 살며 용모, 언어, 문화가 모두 이색적이다. 노르웨이 언어는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언어와 관련이 있다. 지방어에 의해 1850년 새로운 말이 하나 만들어졌는데, 그 이전의 한 공용어와 둘이 현재 쓰이고 있다. 노르웨이 사람의 생활수준은 매우 높으며 주민의 대다수는 루터교회 신자들이다.[10] 노르웨이 인구수는 2010년 410만명인데 이보다 많은 수가 미국에 살고 있는데, 미국 내 노르웨이 이민자 인구는 2010년에 470만명이었다.

언어[편집]

노르웨이어는 단일한 노르웨이어가 아니라 북크몰(Bokmål)과 뉘노스크(Nynorsk)라는 저마다의 문어체계를 갖춘 표준어가 둘 있다.(노르웨이어 분쟁) 오슬로 중심의 동부와 남부는 보크몰(85%)을, 베르겐 중심 서부와 북쪽지방은 뉘노스크(15%)를 사용한다.

문화[편집]

인형의 집》을 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유명하며 음악가 에드바르 그리그도 세계적인 위인이다. 우리에게 "호호 아줌마"의 작자로 알려진 동화작가 알프 프뢰위센도 있다. 또한 "절규"로 유명한 에드바르 뭉크 역시 후기 인상파 화파로서 세계에 알려져 있다.

탐험가 프리티오프 난센로알 아문센도 노르웨이인이다.

1980년대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팝그룹 a-ha도 노르웨이 출신이다.

종교[편집]

노르웨이는 종교개혁 전통에 따라 루터교 국가였다. 2016년 12월 31일까지는 노르웨이의 국교는 루터교였으나, 국교법 개정에 따라 2017년 1월 1일부터 루터교는 국교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다. 2016년 12월 31일까지는 루터교 의식(Ritual)에 따라 교회에서 왕의 즉위식부터 세례, 결혼, 장례 등이 다 행해졌다. 개신교 국가이지만 이슬람, 불교, 로마 가톨릭 등의 종교가 다 보장된다. 부활절, 성령강림주일성탄절처럼 기독교 교회력에 나오는 절기들은 공휴일로 인정된다.

2011년 기준으로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다.[14]

  • 전체: 4,920,305명 (100%)
    • 기독교: 4,115,675명 (83.6%)
      • 루터교:3,911,622명 (79.4%)
    • 비기독교: 133,219명 (2.7%)
      • 이슬람교: 106,735명 (2.1%)
    • 그 밖의 종교: 1,188명 (0.02%)
    • 무교이거나 잘 알 수 없음: 671,411명 (13.6%)
    • 인문주의: 84,481명 (1.7%)

음악[편집]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인 에드바르 그리그, 요한 스벤젠이 노르웨이 출신이다. 또한 20세기 유명 소프라노 가수인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도 노르웨이 출신이다.

헤비 메탈의 하위 장르인 블랙 메탈이 1990년대 노르웨이에서 크게 발전했다. 초기 블랙 메탈을 이끈 밴드로는 엠페러, 다크스론, 고르고로스, 메이헴, 버줌 등이 있으며 당시 블랙 메탈과 관련된 교회 방화나 살인 사건 등으로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었다. 현재 인슬레이브드, 딤무 보거 등은 블랙 메탈을 새로운 형태로 발전시킨 밴드로 인기를 얻고 있다.

참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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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보고 싶은 나라, 1 스위스

 

 

 

 

아이가 좀 더 크면 가보고 싶은 곳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보며 미리미리 공부해두고 있습니다.

 

 

 

 

 

 

<자료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스위스 은행가가 뛰어가면 반드시 그 뒤를 쫓아가라'는 농담이 있을 만큼 스위스인들의 경제 관념은 뛰어나다.

하지만 세계적인 부자 나라인 스위스의 국민들은 기본적으로 검소하고 소박하며,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다른 사람 앞에서 부를 과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스위스인들의 뛰어난 금융 감각은 근면과 성실을 기본으로 하는 청교도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1. 스위스 경제의 기반이 된 용병

중세와 근대 시기, 척박하고 황량한 땅에서 식량을 구하기도 어려웠던 스위스인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방법은 용병이 되는 것뿐이었다. 용병은 전쟁에서 정규군이 부족할 때 대신 돈을 받고 싸워 주는 군사를 말한다.

당시 용병이라고 하면 스위스 용병을 떠올릴 만큼, 유럽 전역을 통틀어 스위스 군사의 용맹함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와 같은 용병의 활약은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자유롭게 스위스 용병을 쓰고자 했던 여러 강대국의 이익과도 맞물려,

오랜 세월 동안 주변 국가에 침략 당하지 않고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여러 나라의 전쟁터에서 활약한 스위스 용병이 가지고 돌아온 상당한 액수의 외화는 스위스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고,

이후 면직물이나 시계 등의 제조업으로 스위스 경제는 발전하기 시작한다.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 : 로마 교황청의 경비 책임은 탁월한 충성심과 용기로 유명한 스위스 병사들이 맡고 있다.

2. 농업과 제조업

농업은 산업 구조가 크게 바뀐 오늘날까지도 높은 생산력을 자랑하는 스위스의 대표적인 산업으로,

스위스는 농업의 50%를 자급하고 있다.

 

주요 작물은 밀, 보리, 감자, 사탕무, 사과, 포도 등이며 치즈 같은 낙농 제품은 외국에 대량으로 수출된다.

 

제조업으로는 정밀함이 요구되는 기계 공업 분야 중에서도 정밀 기계, 금속 가공 기계, 전자 제품 등이 발달하였다.

특히 16세기 말 종교 박해를 피해 들어온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에 의해 처음 전수된 스위스의 시계 산업은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아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흔히 스위스 칼이라고도 불리는 다용도 주머니칼에서도 견고함과 기능을 중요하게 여기는 스위스인의 장인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스위스의 시계 : 스위스의 시계는 수백 년의 역사와 철저한 품질 관리로 세계 최고의 시계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3. 금융업

스위스인들은 돈에 대한 이야기 앞에서는 유난히 과묵하여, 급여나 세금에 관한 문제는 비밀스럽게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스위스인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분야가 스위스 은행이다.

스위스 은행은 '비밀 엄수의 원칙'으로 유명한데, 스위스의 모든 은행원이나 과거에 은행원이었던 사람은

절대로 고객의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지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스위스 은행의 규정을 악용하여 정당하지 못한 경로로 부를 쌓은 사람들이 스위스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경우가 많아서, 스위스 은행의 원칙은 유럽 연합에서 윤리적인 문제로 여러 번 논의가 되기도 했다.

 

 

 

스위스의 사회

스위스의 사회는 자유와 보수()라는 두 요소가 특색이다.

계급적인 차별은 적으나 동업조합()과 코뮨(공동체적 지역사회)을 중심으로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

이를 위하여 일찍부터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다.

1911년에는 상해·질병에 대한 연방사회보험법이 제정되어 국민개보험()이 실시되었다.

1947년 7월에는 노년·과부 보험이 제정되어 1948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또 1951년에는 실업보험법이 연방법으로(사적·공적 보험도 포함) 정해졌다.

유럽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스위스 인구의 결혼시기는 비교적 늦은 편이다.

2001년 기준으로 평균결혼연령은 남자가 30.6세, 여자가 28.0세이다. 혼인율과 이혼율은 모두 유럽의 평균치 이상이다.

많은 스위스 부부들은 먼저 동거를 시작했다가 첫 아이가 출생한 직후 결혼하는 경향이 있다.

스위스인들은 평생동안 평균적으로 2번의 결혼을 하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는데,

결혼한 지 3년 안에 이혼하는 비율도 매우 높아 100명당 38.5명에 달한다.

국제결혼 비율도 매우 높은 편으로 전체 결혼 건수의 50%에 육박하고 있다.

국경일로서는 8월 1일의 독립기념일이 있는데, 이 날은 부근의 가장 높은 산에서 화톳불을 피우고 남녀노소가 연방이나 주의 마크가 든 지등()을 들고 행렬을 지으며, 기념강연·예배·합창 등을 한다.

 

3대 축제로는 제네바 축제(에스깔라드), 바젤의 파스나흐트(Basler Fasnacht), 취리히의 봄 맞이 길드제()가 있다.

 

또 그밖에 다양한 문화축제가 곳곳에서 벌어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상트 갈렌의 어린이축제(Kinderfest),

뤼틀리 사격대회, 베른 양파 시장, 전쟁 기념일, 몽트뢰의 페스티발, 우르내쉬의 질베스터클라우제 축제,

센류레지에의 말쇼(Marche-Concours), 뇌샤텔의 화인 페스티발, 장크트 모리츠 요리 축제등이 있다.

 

스위스의 군사

스위스는 중립국이지만 무장중립의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키기 위한 군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극소수의 교관을 제외하고는 상비군이나 직업군인은 없다.

 

남자는 모두 시민인 동시에 군인이며, 국민개병(:)제도를 취하고 있다.

20∼50세의 남자는 모두 병역의무가 있으며, 17주간의 기본훈련을 받은 후 현역(20∼32세)·예비역(33∼42세)·후비역(:43∼50세)은 각 기간 중에 일정 기간의 재훈련을 받는다.

평시에는 해마다 약 30만 명이 군사훈련을 받고 있으며, 그밖의 사람들은 생활에 종사한다.

 

그러나 군복·무기·탄약을 각자의 집에 상비하고, 언제든지 소집에 응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48시간 이내에 40만 명의 민병을 소집할 수가 있다.

 

1960년 10월에 의회는 핵무장법안을 가결하였으나 1962년 4월의 국민투표에서는 이를 부결하였다. 그러나 1963년 5월의 국민투표에서는 핵무장 문제의 결정의 자유를 정부측에 부여하였으며, 1963년 8월에는 핵실험 금지조약에 조인하였다.

 

2005년 기준으로 군사비는 38억 달러이고 병력은 육군 15만 3,200명, 공군 3만 2900명이다. 이는 이전의 군사 규모에 비해 줄어든 것인데 2003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군병력 감축 정책과 관련되어 있다. 최근들어 무장군대의 국제 평화유지활동 참여가 높아지고 있는데 주로 구 유고 지역과 중동 지역에 파견되어 있다.

스위스의 교육

루소와 페스탈로치를 낳은 스위스는 자원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교육을 강조하여 왔으며

국민교육 수준이 매우 높지만 교육제도는 나라의 정치기구가 분권연방적인 것처럼 주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1848년 이전에 이미 초등교육제도가 정비되었고, 1874년에는 의무교육제도가 확립되었다.

 

6, 3, 3~4년이 기본적인 수업연한이지만 주에 따라 다르며, 수업개시 시기와 취학연령에도 차이가 있다.

의무교육 기간은 8~9년이며 7∼14세까지는 어디에서나 무상교육이다.

 

독일어계 지역의 학교는 프랑스어이탈리아어를, 프랑스어계 지역에서는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는 등

초등학교 때부터 4개의 공용어를 위한 어학교육에는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초등학교의 전체를 평균하면 1학년은 주당 20시간, 5,6학년은 주당 34-36시간의 수업을 이수하게 된다.

 

가장 긴 방학은 여름방학으로 5~9주간 지속된다.

 

중등학교는 칸톤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학교 유형이나 학년 구분에서 아주 다양하게 나눠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는 대입준비학교라고 불리는데 말 그대로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교육기관이다.

대입준비교육의 구조와 시간은 칸톤마다 다양하다. 대입자격증이 있으면 일반대학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진학률은 매우 낮은 편으로 약 10% 정도이다.

 

대학으로는 7개 주립대학(바젤 · 베른 · 프리부르 · 제네바 · 로잔 · 뇌샤텔 · 취리히) 이외에 연방공과대학(취리히)과 상과대학(장크트갈렌)이 있으며, 학생의 약 20%가 외국인인 것도 특색이다.

 

1459년에 세워진 바젤대학은 중요한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스위스의 교통

 

옛날에는 스위스의 알프스를 넘기가 매우 힘들었으나, 짐차·속달편·보행자 등이 알프스에 있는 여러 고개를 많이 이용했다.

그리하여 생베르나르고개의 숙박소에서는 연간 7,000~8,000명이 숙박하였다.

 

철도가 개통되자 고개의 교통은 한때 쇠퇴하였으나, 자동차 시대에 접어들자 다시 생베르나르고개, 생플롱고개, 생고타르고개, 푸르카고개, 슈플뤼겐고개 등을 다시 이용하게 되었다.

 

철도 총연장은 4,583km(2005년)이며, 도로 총연장은 7만 1297km(2004년)로 모두 포장되어 있으며, 이 중 1,728km는 고속도로이다.

 

라인강을 중심으로 한 수로의 총연장은 65km이다(2003년).
 
알프스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곳에는 터널이 만들어져 있는데, 생고타르터널은 길이 15km, 생플롱터널은 19.8km이며,

고개를 통행할 수 없는 겨울철에는 소형차를 열차에 싣고 알프스를 넘는 사람도 많다.

 

1931년에 창립된 반관반민의 스위스항공(SA)은 세계 각지에 항로를 확대하고 있으며, 주요 공항취리히·제네바·바젤 등에 있다.

 

2006년 기준으로 공항은 모두 65개가 있는데 이 중 45개는 포장된 활주로를 갖추고 있다.

 

 

스위스의 관광

 

알프스의 아름다운 경치에 끌려서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스위스를 찾는다.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루체른호()· 브리엔츠호 · 마조르호 · 루가노호 등의 호수와 

루체른 · 인터라켄 · 로잔 · 로카르노 · 루가노 등의 호반도시를 들 수 있다.

 

또 하나의 관광 중심은 산악으로 마터호른 산록의 체르마트, 엥가딘의 장크트모리츠, 다보스 등의 휴양지이다.

 

관광수입은 무역수지의 적자를 메우고, 경제를 윤택하게 해주므로

교통기관의 정비, 8,000개에 이르는 숙박시설 활용, 400명이 넘는 가이드의 교육, 산막()의 정비 등에 주력하고 있다.

 

여름의 알피니스트와 관광객뿐만 아니라 동계() 스포츠를 위해서도 철도에서 분기하는 많은 등산철도와 리프트가 부설되어 있다.

 

2005년 관광수입액은 110억 달러를 기록해 세계 11위를 기록했으나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 미만이다.

 

 

스위스의 문화

 

스위스는 유럽 대륙의 중앙에 있기 때문에 외국 문화가 끊임없이 유입되고,

3대문화권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 다채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또 스위스는 종교개혁·프랑스혁명·나폴레옹전쟁 등과 같은 동란의 시기에 자유와 양식()의 도피처로서 창조적인 인물들을 숨겨주었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도 이러한 문화적 역할에는 변함이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바젤에 거주하였고 릴케는 스위스 남부에 살았으며, 나치스에 쫓긴 아인슈타인은 연방공과대학에 적을 두었고,

토마스 만도 만년()에는 스위스에서 지냈다.
 
제1회 노벨 평화상수상자 앙리 뒤낭(1828∼1910)은 국제적십자의 창설자이다.

 

3대에 걸쳐 8명의 수학자를 낸 바젤의 베르누이가()의 수학과, L.오일러(1707∼1783)의 광학 · 기계학 · 항해술은

오늘날 공업국의 기초가 되었다.

 

인문·사회과학 방면에서는 E.파텔(1714∼67)이 국제법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화사가이며 미술사가인 J.부르크하르트(1818∼1897)는 《이탈리아 문예부흥기의 문화》, 《그리스 문화사》 등의 저작으로 유명하다.

 

또 《푸른 하인리히》의 저자 고트프리트 켈러(Gottfried Keller, 1819∼1890),

《올림포스의 봄》 등의 서사시를 쓴 칼 슈피텔러(Carl Spitteler, 1845∼1924),

《하이디》(알프스 소녀)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여류작가 요한나 슈피리(Johanna Spyri, 1827∼1901) 등이 유명하다.

 

이외에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urrenmatt, 1921~1990)와

막스 프리쉬(Max Frisch, 1911-1991)의 작품들은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헤르만 헤세도 비록 독일 태생이지만 스위스에 귀화하여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또 건축학에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서양의 건축 경향을 크게 좌우했던 국제건축학교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출판업의 역사는 오래 되었으며 바젤의 슈바프는 1464년에 창설되었다.

스위스의 출판은 특히 학술 · 미술 · 과학서적에서 뛰어나다.

 

신문은 약 100종 정도가 발행되고 있는데, 250만 부로 적은 편이며 주내()에만 배부될 정도의 지방지들이다.

 

중립을 지키는 민주주의의 나라이니만큼 기사의 공평성과 논설의 정당성에는 정평이 있으며,

특히 취리히의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Neue Zurcher Zeitung》은 세계의 10대 고급지 또는 3대 고급지로 꼽힐 정도로 명성이 높다.

 

발행부수로 본 스위스의 5대 신문은 《블릭(Blick)》, 《타게스-안차이거(Tages-Anzeiger)》,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 《디쥐트옷트슈바이츠(Die Sudostschweiz GES)》, 《베르너 차이퉁(Berner Zeitung)》이다.

 

라디오·텔레비전 방송은 스위스민영방송회사에 의해 관리되며 대부분 비영리적이다.

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로 방송하는 3개 국립방송국이 있고, 레토로망스어 방송도 독일어 방송국에서 하고 있다.

다만 상업방송은 없다.

 

스위스 국민은 겨울스포츠를 즐기며 봅슬레이 · 스키 선수들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스위스의 문화사업 및 문화의 보존·발전은 주정부, 지방자치단체, 사설문화재단이 담당하고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발생 직전인 1939년 연방정부에 의해 설립된 스위스 문화재단 프로 헬베티카(Pro Helvetia)가

스위스 문화를 신장 · 보존하고 외국과의 문화를 교류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스위스의 과학기술

스위스의 과학기술, 특히 기계제조 기술은 세계적이다.

고부가가치 기계수출이 세계 3위 수준인데,

특히 정밀기계, 금속가공기계, 발전 및 선박용 터빈, 인쇄 기기, 사진재료, 전자제품 및 의료 기기 제조 부문이 우수하다.

 

이외에 광학기기, 발전설비, 환경보전설비, 정밀측정기기의 제조도 뛰어나다.

 

특히 스위스의 시계 제조 기술은 매우 뛰어나 스위스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데 전세계 고급시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연간 약 1억개의 시계를 생산하며 총 생산 중 95%를 수출한다.

적은 인구규모에 비해 과학기술이 발달할 수 있었던 토대는 기초 과학에서 뛰어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2006년까지 스위스는 노벨 물리학상에서 4명, 화학상에서 6명, 생리의학상에서 6명의 수상자(국적 기준)를 배출하였다.

 

1920년 샤를 E. 기욤(Charles Edouard Guillaume)이 스위스 국적의 학자로는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독일 출신이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현대 이론물리학의 아버지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도 스위스국립공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스위스 국적으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외에 1986년 하인리히 로러(Heinrich Rohrer), 1987에는 칼 A. 뮐러(Karl Alexander Muller)가 같은 상을 수상했다.

 

1913년 알프레트 베르너(Alfred Werner)는 스위스 국적의 학자로서 최초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37년 파울 카러 (Paul Karrer), 1939년 레오폴드 S. 루지치카(Leopold Stephen Ruzicka), 1975년 블라지미르 프렐로그(Vladimir Prelog), 1991년 리하르트 R. 에른스트(Richard R. Ernst), 그리고 2002년에는 칸트 뷔트리히(Kurt Wuthrich)가 같은 상을 수상했다.

1909년 에밀 T. 코허(Emil Theodor Kocher)로부터 시작된 노벨 생리의학상은,

1948년 에밀 T. 코허(Emil Theodor Kocher), 1949년 발터 R. 헤스(Walter Rudolf Hess),

1950년 타도이스 라이히슈타인(Tadeus Reichstein), 1978년 베르너 아르버(Werner Arber),

1996년 롤프 M. 칭커나겔(Rolf M. Zinkernagel)까지 이어졌다.

2000년 기준으로 GDP 대비 연구개발비의 비중은 2.6%로 매우 높은 편이며, 총 25,808명의 연구인력이 기술개발에 힘쓰고 있다.

특허출원건수는 2002년 기준으로 254,428건인데,

이것은 일본, 미국, 독일, 영국 다음으로 스페인, 스웨덴과 함께 세계 5위권에 해당한다.

이는 인구 수를 감안할 때 스위스가 신기술 개발에 있어 매우 높은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스위스의 대한관계

한국과 스위스는 1962년 3월에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였으며, 북한과는 1974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한국과 스위스 양국간 무역증진과 유대강화를 위해 1971년에 ERPI 투자촉진 및 보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어 1975년 항공협정, 1977년 공업소유권협정, 1979년 사증면제협정, 1981년 이중과세방지협정을 체결하였다. 1990년 정기항공운항에 관한 협정 부속서 개정, 1995년 항공협정, 1999년 한·스 무역경제협력협정에 서명하였다. 또한 2005년 7월에는 우리나라와 스위스가 주요 회원국으로 활동하고 있는 EFTA(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 유럽자유무역연합)간에 자유무역협정(FTA)이 최종 타결되었고 2006년 9월 1일 정식 발효되었다.
 
1979년에 열린 스위스 기술 세미나 '스위텍 79'는 한국·스위스 양국의 교역증진 및 기술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1980년의 스위스 기술박람회 '스위스코어 80' 또한 양국간의 경제협력에 큰 계기가 되었다. 민간 경제교류는 1977년 3월 한국·스위스 민간경제협력위원회의 창립총회를 시발로 1978년 4월에 제1차 합동회의가 개최되었다.

 

1980년 5월 29일에는 제2차 한국·스위스 경제협력위원회의 합동회의가 열려 재정 및 기술협력문제, 기술이전센터의 설치문제, 양국간 무역확대 및 제3국 공동진출 문제 등을 협의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89년 대통령 노태우가 스위스를 방문하였고, 1999년에는 통상교섭본부장 한덕수가 다보스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스위스를 방문하였으며 스위스 경제부 장관 파스칼 코쉐핀이 스위스 민·관 경제 사절단과 함께 방한하였다.

 

2001년에는 한국은행 총재 전철환이 스위스를 방문하였다.
 
한국과 스위스는 상호 보완적인 교역구조를 배경으로 매해 교역규모가 늘어나고 있다. 1993년에 8억 1천만 달러였던 교역액은 2006년에는 21억 5,90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2006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대스위스 수출액은 8억 4,000만 달러이고 수입액은 13억 1,900만 달러로 무역수지 4억 7,8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했지만 이것은 2002년 이후 가장 적은 수준이다. 주요 수출품은 자동차, 핸드폰, 가전제품(TV, DVD Player), 반도체 및 전자 부품, 타이어 등이며, 주요 수입품은 정밀기계 및 화학제품, 의약품 등이다. 

 

스위스

유럽 중앙부에 있는 나라로, 중세에 프랑크왕국, 신성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1291년 스위스 지역의 3인 대표가 국가의 기원이 된 영구동맹을 맺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 따라 독립을 승인받았다.

 

정식명칭은 헬베티아 동맹(Confederation Helvetica)이고, 독일어로 'Schweizerische Eidgenossenschaft', 프랑스어로 'Confederation Suisse', 이탈리아어로 'Confederazione Svizzera'라고 한다. 통상적으로는 스위스연방(Swiss Confederation)이라고 표현한다.

북쪽으로 독일, 동쪽으로 리히텐슈타인·오스트리아, 남쪽으로 이탈리아, 서쪽으로 프랑스에 접한다. 

 

정치적으로는 직접민주주의를 채택하여 국민들이 직접 국가 주요 정책에 참여하여 의사결정하는 정치구조이다. 유로존에는 가입하지 않고 독립적인 통화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26개주(canton)로 이루어진다. 

 

 

행정구역

그라우뷘덴주, 글라루스주, 뇌샤텔주, 니트발덴주, 루체른주, 바젤란트주, 바젤슈타트주, 발레주, 베른주, 보주, 샤프하우젠주, 슈비츠주, 아르가우주, 아펜첼아우서로덴주, 아펜첼이너로덴주, 옵발덴주, 우리주, 장크트갈렌주, 제네바주, 졸로투른주, 쥐라주, 추크주, 취리히주, 투르가우주, 티치노주, 프리부르주

 

주요도시

라우터브루넨, 로잔, 로카르노, 루가노, 루체른, 몽트뢰, 바젤, 베른, 샤프하우젠, 알프스, 인터라켄, 장크트갈렌, 장크트모리츠, 제네바, 체르마트, 취리히, 툰호, 프리부르

 

 

역사적으로는 로마시대부터 이지역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켈트족의 한 갈래인 헬베티아족이 거친 산악지역을 일구며 거주했다.

 

중세를 거치면서 프랑크왕국에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291년 스위스연방이 성립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공격을 물리치고

 

1499년 바젤조약에 의거하여 스위스는 독립국가로 인정되었다.

 

1815년 오스트리아 빈 회의에서 중립국이 되었다.

 

1971년이 되어서야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국토의 대부분이 알프스산맥의 능선에 걸쳐있고 고원과 깊은 계곡, 호수가 많다.

이때문에 세계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관광지가 발달되었으며 세계 최고의 관광산업국가로 평가받는다. 

 

전통적으로 시계, 공구 등 정밀기계 산업이 발달되었으며 낙농업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스위스의 지형

 

스위스는 국토를 지형에 따라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쥐라산맥 지역, 중앙저지(스위스고원) 지역, 알프스산맥 지역의 3지역으로 나뉜다.

 

쥐라산맥은 남쪽의 알프스산맥에 비해 해발고도가 낮으며, 주로 중생대의 석회암으로 되어 있는 전형적인 습곡산지이다.

스위스 영내의 쥐라산맥 중 최고점은 1,679m로 비교적 낮은 해발고도이지만, 이 산지는 유럽 교통상의 일대 장애였다.

본래 쥐라산맥 지역은 농업과 임업이 활발한 지역이었는데,

겨울철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시작된 시계공업이 지금은 스위스의 대표산업이 되었다.

 

북쪽의 쥐라와 남쪽의 알프스의 두 산지에 낀 중앙저지는 습곡작용을 그다지 받지 않은 곳이며

주로 제3기층으로 된 해발고도 300~800m의 완만한 구릉성 지역이다.

빙하퇴적물에 막혀서 형성된 레만·뇌샤텔·취리히 등의 대도시가 있고, 인구밀도가 높다.

중앙저지의 남쪽은 스위스 국토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알프스산맥 지역이다.

화강암·편마암 등의 결정질 암석으로 된 알프스산맥은 스위스 · 독일 국경의 보덴호()로부터

그라우뷘덴주()의 슈플뤼겐 고개를 지나 이탈리아의 코모호에 이르는 구조선()에 의해 동서로 양분되며,

동()알프스에 비하여 서(西)알프스의 해발고도가 전반적으로 높고 산세도 험하다.

알프스는 론강() 및 라인강() 상류의 동서 방향으로 된 계곡에 의하여

당뒤미디(3,257m) · 융프라우(4,158m) · 핀스터아르호른(4,274m) 등을 포함한 북()알프스와

프랑스 · 이탈리아 국경에 있는 몽블랑(4,807m) · 마터호른(4,478m) · 몬테로사산(4,634m) 등을 포함한 남()알프스로 양분된다.
알프스는 유럽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지며, 여기서 발원한 라인강은 북해로, 론강은 지중해로, 인강()은 도나우강()에 유입하여 각각 흑해로 흘러든다.

 

스위스 국내에서는 라인강 수계의 유역면적이 국토의 68%를 차지하며 론강 수계의 18%가 그 뒤를 잇는다.

 

이 알프스산맥 지역에는 생고타르 · 그랑생베르나르 · 슈플뤼겐 등,

독일 및 이탈리아와 연결되는 고개가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교통로의 역할을 해왔다.

현재는 생플롱·리켄·생고타르 등의 고개에는 터널이 뚫려 있고 철도가 지난다.

 

스위스의 기후

스위스의 기후는 국토가 좁은 데 비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동서로 뻗은 알프스산맥 남쪽의 티치노주()는 비교적 온난한 지중해성기후의 영향을 받으나,

북쪽은 기온차가 적은 온난다우의 서안해양성기후와,

기온차가 큰 건조한 대륙성기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변덕스러운 중간형 기후이다.

 

이처럼 3개의 기후형을 가진 스위스에서는 날씨 변화가 몹시 심하다.

스위스 북쪽에 저기압이 발생하여 알프스 양쪽에 극단의 기압차가 생기면 푄현상이 일어난다.

푄현상이 일어나면 알프스 북쪽에서는 기온이 급격히 상승하여 봄이나 여름이면 눈이 급속히 녹아버린다.

또 중앙지대에서는 푄이 심한 날이면 두통과 그밖의 생리적 변조(調)를 일으키는 사람이 많다.

 

강수량은 일반적으로 여름에 많으며, 강수량이 가장 많은 달과 가장 적은 달의 비율은 약 2:1이다.

 

연간강수량은 산지일수록 많은데, 가령 융프라우의 정상에서는 4,000mm 이상,

생고타르고개에서는 약 2,000mm이지만, 도시가 많은 중앙저지에서는 1,000mm 안팎이다.

기온은 알프스의 북쪽과 남쪽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가령 알프스 북쪽의 중앙 저지에 있는 도시에서는 1월 평균기온이 영하인 곳이 많으며, 7월 평균기온도 20℃를 넘는 곳이 없다.

이에 비하여 남쪽의 루가노로카르노에서는 1월과 7월의 평균기온이 각각 2℃ 및 22℃ 안팎이다.

식생분포는 해발고도와 함께 변하는 기후조건에 따라 다르다.

즉 스위스의 식생은 기후와 마찬가지로 가지각색이다.

알프스 남부의 티치노주에서 알프스를 넘어 중앙저지에 이르기까지의 식생변화는

지중해 연안에서 북유럽에 이르기까지의 식물경관의 변화를 축소해놓은 느낌을 준다.

활엽수림대의 한계는 해발고도 약 1,000m로 한때는 떡갈나무가 많았으나 현재는 너도밤나무가 우세하며, 그 밖에 느릅나무, 단풍나무 등도 볼 수 있다.

 

침엽수림대의 한계는 약 2,200m로 전나무와 소나무가 주체이며,

삼림한계의 위쪽은 눈잣나무지대, 또 그 위쪽은 여름에 눈이 없을 때 초지를 이룬다

 

.또 알프스의 남쪽 가장자리 지대에서는 낙엽성 밤나무와 호랑가시나무 등의 경엽수를 볼 수 있다.

 

 

 

스위스의 주민

스위스의 인구는 2007년 추정치 기준으로 약 755만명 정도로 오스트리아보다 조금 작다.

 

스위스에서 가장 큰 도시는 취리히(Zurich)로 인구는 114만명(2005년 기준)이다. 전 인구의 약 68%가 도시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유럽의 평균보다 낮은 수치이다. 인구 추계에 따르면 스위스의 전체 인구는 2025년경 740만명, 2050년 경에는 720만명 정로로 조금씩 인구가 감소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007년 추계 기준으로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약 0.38%이며, 평균수명은 80.6세(남자 77.8세, 여자 83.6세)로 서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다. 15세 미만 인구와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이 모두 16% 정도(2006년)로 스위스의 인구 고령화 정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2007년 추계 기준으로 조출생률과 조사망률은 각각 인구 1,000명당 9.7명과 8.5명이고, 합계출산율은 1.44으로 독일, 오스트리아와 함께 서유럽 국가들 중 가장 낮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스위스에는 크게 4개의 언어집단, 즉 독일어(알라만인의 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가  있다.

 

로망슈어는 라틴어와 이탈리아어가 혼합된 것으로 그라우뷘덴주()의 외딴 골짜기에서 로마시대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인구의 1% 정도가 이 언어를 쓴다. 이들 언어는 모두 공용어로 인정된다.

스위스는 다민족국가이지만 저마다 인접한 대민족과 결부하려는 ‘분리운동’이 전혀 없다.

 

독일어는 중앙부와 북부를 주체로 가장 넓은 지역에서 약 64%가 사용한다.

 

프랑스어는 프랑스와 가까운 서부 지방에서 인구의 약 20%가 사용하고,

이탈리아어는 남동부의 티치노주, 그라우뷘덴주에서 인구의 약 7%가 사용하고 있다.

 

독일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회화체의 스위스독일어는 독일에서 사용되는 독일어와는 다르며,

지방에 따라서도 천차만별이다.

단,  문장으로 된 독일어는 스위스 전역 및 독일·오스트리아가 모두 같다.

스위스에 사는 사람들은 각 언어의 모국에 속한 사람들이며, 인종적· 민족적으로 스위스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체를 이루는 것은 켈트인의 한 파인 헬베티아인이며, 이들은 본래 라인강(마인강 유역에서 살다가 BC 400년경 침입하여 중부에 정착하였다. BC 57년 이들은 J.카이사르에게 정복되어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455년에는 북부·동부에 게르만의 한 종족인 알라만인이 민족이동에 따라 침입해오고, 서부에는 로마화한 부르군트인이 침입·정착함으로써 로마의 지배는 끝났다. 5∼6세기에는 프랑크왕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동()프랑크(신성로마제국) 왕국령이 되자 많은 독립영토로 세분화되었다. 원시 3주를 중심으로 스위스 연방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그곳에 살고 있는 독일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등이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종교는 국민의 약 41.8%가 로마가톨릭교를 신봉하며, 그 뒤를 이어 개신교가 35.3%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슬람교(4.3%)와 그리스정교(1.8%)도 소수의 사람이 신봉하고 있다.

2004년을 기준으로 UNDP인간개발지수(HDI)는 0.947로 조사대상국 177개국 중 9위를 차지하였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삶의 질을 유지하고 있다.

 

 

 

<자료 출처 : 위키피디아> : 스위스의 칸톤

칸톤

주도

칸톤

주도

Wappen Aargau matt.svg

아르가우

아라우

Wappen Nidwalden matt.svg

*니트발덴

슈탄스

Wappen Appenzell Ausserrhoden matt.svg

*아펜첼아우서로덴

헤리자우

Wappen Obwalden matt.svg

*옵발덴

자르넨

Wappen Appenzell Innerrhoden matt.svg

*아펜첼이너로덴

아펜첼

Wappen Schaffhausen matt.svg

샤프하우젠

샤프하우젠

Coat of arms of Kanton Basel-Landschaft.svg

*바젤란트

리슈탈

Wappen des Kantons Schwyz.svg

슈비츠

슈비츠

Wappen Basel-Stadt matt.svg

*바젤슈타트

바젤

Wappen Solothurn matt.svg

졸로투른

졸로투른

Wappen Bern matt.svg

베른

베른

Coat of arms of canton of St. Gallen.svg

장크트갈렌

장크트갈렌

Wappen Freiburg matt.svg

프리부르

프리부르

Wappen Thurgau matt.svg

투르가우

프라우엔펠트

Wappen Genf matt.svg

제네바

제네바

Wappen Tessin matt.svg

티치노

벨린초나

Wappen Glarus matt.svg

글라루스

글라루스

Wappen Uri matt.svg

우리

알트도르프

Wappen Graubünden matt.svg

그라우뷘덴

쿠어

Wappen Wallis matt.svg

발레

시옹

Wappen Jura matt.svg

쥐라

들레몽

Wappen Waadt matt.svg

로잔

Wappen Luzern matt.svg

루체른

루체른

Wappen Zug matt.svg

추크

추크

Wappen Neuenburg matt.svg

뇌샤텔

뇌샤텔

Wappen Zürich matt.svg

취리히

취리히

 

 

스위스의 칸톤은 다른 나라의 주와 비교했을 때, 상당한 자율성과 영구적 헌법상 지위가 있다. 연방 헌법에 따르면, 모든 26개 칸톤은 동등한 지위이다.

 

공휴일

신년 1월 1~2일

성 금요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념절기

부활절

성 월요일: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당한 주간인 성 주간의 첫 번째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 승천일

성령강림주일의 월요일

건국 기념일 8월 1일

크리스마스 12월 25일~26일

축제

국경일로서는 8월 1일의 독립기념일이 있는데

이 날은 부근의 가장 높은 산에서 화톳불을 피우고 남녀노소가 연방이나 주의 마크가 든 지등을 들고 행렬을 지으며,

기념강연, 예배, 합창 등을 한다.

 

3대 축제로는 제네바의 사보이 공에 대한 승리의 축제, 바젤의 카니발, 취리히의 길드제가 있다.

또 그밖의 가을의 포도 수확제, 산지의 목장에서 소가 하산해 온 것을 축하하는 축제, 사격동맹제 등이 있다.

 

또한 각 주마다 독특한 축제가 있어서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다.

 

2월에는 루체른바젤에서 사육제가 열린다.

5~7월에는 로잔에서 국제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6월에는 취리히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7~8월에는 융프라우주변에서 알펜제 축제를 연다.

8월에는 제네바 여름음악회를 연다. 8월 1일에 스위스의 건국 기념일이 있어 요들송 공연을 한다.

8월 중순~9월 초순에는 루체른 페스티벌이 있다.

11월에는 베른 양파 시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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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은 지하철과 연결되어 있어, 방문하기 참 편리합니다.

대지가 넓어서 하루종일 걸으며 산책하기도 좋고, 용산가족공원이랑 붙어 있어, 돗자리 깔고 도시락 까먹기도 좋습니다.

 

처음 방문했을때는 바닥과 벽면의 온화한 빛깔의 대리석이 참 맘에 들었습니다. 

매번 갈때마다 새로운 전시회를 하고 있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식당이 세군데 있는데, 처음엔 뭘 몰라서 가장 번잡한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건물 안으로 더 들어가니 조용하고 우아하게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이 있더라고요.

 

박물관 앞뜰에 호수가 있어서 호수를 돌며 산책도 하고,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모래장난하며 노는 걸 더 좋아했습니다.

 

수천년된 유물과 교과서에서만 보던 보물을 맘껏 보고,

공원에서 한 두시간 걷고 집에 오니 뭔가 보람된 하루를 보낸 것 같습니다.

 

 

 

 

 

 

 

 

 

 

 

 

 

 

 

 

저번에 너무 잘 생겨서 눈을 비비며, 아니 어떻게 이렇게 잘 생긴 불상이 있지? 하며 보던 불상을 다시 찾아봤는데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불상은 제 눈에는 무척 생동감있고 분위기 있어서 한장 찍어 봅니다.

 

 

 

어두운 유리 방에 모셔 놓은 반가사유상은 유리에 비치는 수 많은 반사된 모습이 더 신비롭게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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