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역에서 강원도 양양에 있는 낙산사 홍련암까지 174km 거리이며,

서울양양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총 2시간 10분 정도 예상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세운 사찰입니다.

의상대사는 신라시대 승려로 화엄종을 우리나라에 처음 만든 분입니다.

화엄경을 중심으로 한다고 해서, 화엄경에 대해 대충 살펴보니, 상당히 기독교와 비슷한 면이 있어요.

우주의 이치인 비로자나불과 하나 되는 것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깨달은 부처가 되어 가는데, 이 세상에 이바지함으로써 자신이 높아진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10단계 보살의 특징과 보살이 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여 있다니,

마음공부 하거나 의식공부하는데 참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98-19

 

 

 

낙산사 홍련암

  

 

거센 파도가 장관입니다.

 

 

 

 

 

다음은 네이버에서 검색한 의상대사에 대한 소개입니다.

 

의상[ () ] 대사

신라시대의 승려로 화엄종()의 개조이다.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연구하고 돌아와 10여 개의 사찰을 건립하고 화엄의 교종을 확립하는데 힘썼다. 저서에《화엄일승법계도()》 등이 있다.

 

625 ~ 702
종교
《화엄일승법계도》, 《십문간법관》 등

목차

  1. 화엄사상
  2. 관음신앙과 미타신앙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한신()이다. <삼국유사()>에는 이름의 한자 표기가 ‘(의상)’으로 되어 있지만, ‘(의상)’이나 ‘(의상)’으로 기록되어 있는 문헌도 있다. 625년(진평왕 47년)에 경주에서 태어나, 644년(선덕여왕 13년) 황복사()에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650년 원효()와 함께 현장()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신유식()을 배우기 위해 중국의 당() 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에서 첩자()로 몰려 사로잡히면서 실패하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661년(문무왕 원년)에 당의 사신을 따라 뱃길로 중국 유학을 떠났고, 양주()에 머무르다가 이듬해부터 종남산() 지상사()에서 중국 화엄종()의 2대 조사()인 지엄(, 602∼668)에게서 화엄() 사상을 배웠다. 668년 7언() 30구() 210자()로 화엄사상의 핵심을 도인()으로 나타낸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였다.

의상은 671년(문무왕 11년)에 신라로 돌아왔는데, <삼국유사>에는 당 나라 군대가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알리기 위해 서둘러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귀국한 뒤에 동해의 굴에서 관음보살()를 친견()하고 낙산사()를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당시의 <백화도량발원문()>이 전해진다. 676년(문무왕 16년)에는 왕명에 따라 과거 삼국()의 요충지였던 죽령() 인근에 부석사()를 짓고 그 곳에서 화엄의 교리를 널리 전파하고 제자를 양성하여 ‘해동() 화엄()의 초조()’라 불리게 되었다. 그의 문하에서는 오진(지통(표훈()·진정()·진장()·도융()·양원()·상원(능인(의적() 등 ‘의상십철()’이라 불리는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이들 가운데 지통()은 노비 출신이었으며, 진정()도 품을 팔아 연명하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의상과 그 제자들에 의해 화엄사상은 신라 사회에 널리 확산되었고, 신라 하대()에는 전국 곳곳에 화엄종 사찰이 세워졌다. 그 가운데 부석사(), 비마라사(), 해인사(), 옥천사(), 범어사(), 화엄사(), 보원사(), 갑사(), 국신사(), 청담사() 등을 ‘화엄십찰()’이라고 한다.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갑사 등은 오늘날에도 대찰()로 이름이 높다. 또한 의상의 제자인 표훈()에게 화엄사상을 배운 김대성()이 화엄의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세운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남아 있다.

의상은 702년(효소왕 11년)에 7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으며, 고려 숙종에게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중국과 일본 등에도 큰 영향을 끼친 학승()이었지만, 매우 적은 저술만을 남겼다. 그나마 <십문간법관()>, <입법계품초기()>, <소아미타경의기()> 등의 저술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으며, <화엄일승법계도()> 외에 <백화도량발원문()>, <일승발원문()>, <투사례()> 등의 짧은 글들만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꾸준히 연구되어, 신라 하대에는 <화엄일승법계도()>에 관한 주석서인 <법융기()>, <대기()>, <진수기()> 등이 편찬되었고, 이들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법계도기총수록()>으로 집대성되었다. 이처럼 의상이 매우 적은 저술만 남겼지만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을 두고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온 솥의 고기 맛을 알려면 한 점의 살코기로도 충분하다”고 평했다.

<삼국유사>에는 의상의 전기()와 함께 낙산사, 부석사 등의 창건과 관련된 여러 개의 설화가 전해진다. 중국의 송() 나라 때에 찬녕()이 편찬한 <송고승전()>에도 의상의 전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날 경상남도 거창 우두산()의 의상봉()이나 강원도 양양 낙산사()의 의상대() 등의 명칭은 의상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엄사상

의상은 ‘해동화엄()의 초조()’라는 별칭처럼 화엄사상의 발전과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사상은 중국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중국에서 법장(, 643~712)이 화엄종의 교리를 집대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는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서신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특히 의상은 개인적 저술과 교화 활동을 중심으로 했던 원효와는 달리 부석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화엄교단을 세웠는데, 이는 통일 이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불교가 왕권의 안정적 운영과 사회적 통합의 이념적 기반으로 역할을 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그가 668년에 저술한 <화엄일승법계도()>에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일승법계도()’, ‘법계도()’, ‘법도장()’, ‘법성도()’, ‘해인도()’ 등으로도 불리는 <화엄일승법계도()>는 화엄 사상의 핵심을 7언 30구의 운문()으로 나타낸 것이다. 게송()들은 4개의 ‘회()’자 모양의 도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글자인 ‘법()’과 마지막 글자인 ‘불()’이 가운데에서 다시 만나 이어진다. 각 게송()과 그것들의 배열은 <화엄경()>의 근본정신과 깨달음의 과정을 나타내고 있어, <화엄경>의 핵심 내용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화엄종()은 천태종()과 더불어 중국 불교 교학()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종파이며, <화엄경()>을 주요 경전으로 삼아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화엄종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서로 끊임없이 연관되어 있으며, 그대로가 바로 불성()의 드러남이라고 하는 ‘법계연기설()’과 ‘성기설()’을 주장해 ‘법계종’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법계()의 연기()에서 존재의 본체인 ‘리()’와 현상인 ‘사()’는 서로 장애가 되지 않으며, ‘사()’와 ‘사()’ 또한 서로 원융()한다는 ‘이사무애()’와 ‘사사무애()’를 강조한다. 곧 화엄사상은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여서 우주 만물이 서로 원융()하여 무한하고 끝없는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에서 이러한 화엄사상의 핵심을 압축해서 나타내고 있을 뿐 아니라, ‘이리상즉설()’ 등 독창적인 사상을 제시했다. 의상의 법계연기설은 ‘리()’도 ‘사()’처럼 차별적인 것임을 인정하여 ‘이리무애()’까지를 포함한다. 그리고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일체 속에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 )”라는 구절은 모든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상즉상입()’의 연기()를 나타낸다.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존재하므로 하나가 없으면 일체도 있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일체가 없으면 하나도 있을 수 없다. 결국 하나와 일체는 서로를 포용하며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나와 일체가 서로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서로를 인정해야 성립할 수 있다는 상입상즉()의 연기설은 모든 개체의 평등과 조화를 지향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 이루어져 고정된 본성이 없으므로 분별이 없는 중도()에 일체의 법이 있게 된다. 또한 중도에 따라 흔들림 없이 본래부터 고요한 법성()을 깨달으면 그를 일러 부처라 한다고 하여, 모든 것이 불성의 현현()이라는 ‘성기설()’을 강조한다. 이처럼 의상의 법계연기설()은 중도를 강조하며 개체의 독자성과 개체간의 융합을 동시에 인정하는 특색을 지니고 있고, 이는 중생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모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나타났다.

관음신앙과 미타신앙

한편 의상은 관음() 신앙과 미타() 신앙을 중심으로 불교를 널리 보급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의상의 관음 신앙은 그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했다는 낙산사() 창건 설화에서 잘 나타나는데, 자비()로 중생을 보살피는 관음보살이 이 땅에 상주()하고 있다는 ‘관음상주신앙()’은 사람들이 불교를 좀 더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나아가 이러한 관음상주신앙은 <화엄경>의 ‘보살주처품()’에 기초해 국토 이곳저곳에 보살이 상주()하고 있다는 ‘보살주처신앙()’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는 신라가 본래 불국정토()라는 ‘불국토 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의상의 미타신앙은 그가 676년에 문무왕의 명으로 세운 부석사()의 가람 배치 등에서 그 특징이 확인된다. 무량수불(), 무량광불()이라고도 하는 아미타불()은 서방의 극락정토()에서 설법을 한다는 부처이며, 미타신앙이란 이러한 아미타불이 있는 정토()로의 왕생()을 기원하는 믿음을 가리킨다. 부석사는 무량수전(殿)을 본전(殿)으로 하여 미타신앙에 기초하고 있는데, 화엄() 사상의 보급에 앞장섰던 의상이 비로자나불()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정토종()에서 숭앙하는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하여 절을 창건했다는 사실은 신라 불교가 지닌 통불교()의 특징을 반영한다. 그리고 부석사의 불상은 불교의 관행에서 벗어나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가파른 경사면에 계단식으로 축대를 쌓아 세워진 가람은 크게 3단으로 나뉘어 ‘구품왕생()’의 정토사상에 기초해 배치되어 있다. 곧 부석사는 정토의 모습을 실재화하여 세워졌는데, 이는 의상의 미타신앙이 불국토 사상에 기반하여 현세 중심적인 왕생 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의상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바로 불성()의 드러남이라는 화엄() 사상에 기초하여 현세 중심의 정토사상을 확립하였다. 이를 기초로 현실 세계에 정토의 이상 세계를 구현하려는 불국토 사상은 신라의 중요한 문화적 특징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이는 석굴암과 불국사의 건설 등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불국토 사상은 외래 종교인 불교를 토착화하고, 불교가 통일 이후의 현실에서 사회 통합의 이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상 [義湘(相)]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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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피디아

 

오스트레일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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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연방
Commonwealth of Australia
Flag of Australia.svg Coat of Arms of Australia.svg
국기 국장
표어 없음
국가 아름다운 오스트레일리아여 전진하라1
Australia on the globe (Antarctic claims hatched) (Oceania centered).svg
수도 캔버라 남위 35° 18′ 29″ 동경 149° 07′ 28″ / 남위 35.308056° 동경 149.124444° / -35.308056; 149.124444
최대 도시 시드니 남위 33° 51′ 36″ 동경 151° 12′ 40″ / 남위 33.859972° 동경 151.211111° / -33.859972; 151.211111
정치
공용어 없음
국민어 영어
정치체제 군주제(영연방), 입헌제, 민주제, 내각제
여왕
연방 총독
연방 총리
엘리자베스 2세
피터 코스그로브
스캇 머리슨
역사
독립  
 • 독립 영국으로부터 독립
1901년 1월 1일2
지리
면적 7,741,220km2 (6 위)
내수면 비율 1%
시간대 다양함 (UTC+8~11)
DST 다양함 (UTC+8~11.5)
인구
2015년 어림 23,966,800명 (51위)
인구 밀도 2.8명/km2 (233위)
경제
GDP(PPP) 2015년 어림값
 • 전체 $1조2410억 (17위)
 • 일인당 $51,642 (9위)
HDI 0.933 (2위, 2013년 조사)
통화 달러 (AUD)
기타
ISO 3166-1 036, AU, AUS
도메인 .au
국제 전화 +61

1 왕실 국가는 God Save the Queen이다.
2 1931년부터 웨스트민스터 법이 적용되었고, 1986년에 독자적인 헌법을 보유하게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영어: Commonwealth of Australia 코먼웰스 오브 오스트레일리아[*], 문화어: 오스트랄리아 련방), 줄여서 오스트레일리아(영어: Australia, 문화어: 오스트랄리아) 또는 호주(濠洲)는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나라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본토와 태즈메이니아 섬, 그리고 인도양태평양의 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에서 6번째로 면적이 넓은 나라이다. 북쪽에는 인도네시아동티모르, 파푸아뉴기니, 북동쪽에는 솔로몬 제도바누아투, 누벨칼레도니, 그리고 남동쪽에는 뉴질랜드가 있다. 수도는 캔버라이고, 주요 도시로는 시드니, 맬버른, 브리즈번, 퍼스, 골드코스트, 애들레이드, 다윈 등이 있다.

18세기 말 유럽인들의 이주 이전에 최소 40,000년 전부터 원주민들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1606년 네덜란드 공화국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한 이후 1770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오스트레일리아 동쪽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삼았으며, 1788년 1월 26일부터 뉴사우스웨일스주식민지로 죄인들을 수송해 정착시키기 시작하면서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인구는 차츰 늘기 시작했고, 대륙은 계속 탐험되어 다섯 개의 자치 식민지가 추가적으로 건설되었다. 1901년 1월 1일, 여섯개의 식민지가 연합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설립하였다. 모국인 영국과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다른 정체성을 점차 가지게 되었다. 1942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의 적용을 받아 행정적으로 모국과 분리되었으며, 1948년부터 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하는 대영 제국 신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을 사용하게 되었다. 1986년 오스트레일리아 법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어 영국 의회의 오스트레일리아 내 입법권이 정지되었으며, 사법권도 최고재판소가 런던의 추밀원에서 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으로 옮겨짐으로서 영국과의 남은 법적 종속관계를 단절하여 자주국가가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캐나다, 뉴질랜드를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과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으며 국가원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대표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총독이며,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연방 성립 이후부터 대의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호주는 6개의 주와 2개의 준주, 6개의 특별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고 2,290만 정도의 인구는 대부분 동쪽 지역에 밀집되어 있으며, 도시화 비율이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다.

오스트레일리아는 GDP가 세계에서 열두 번째로 높고, 1인당 GDP은 6번째로 높은 대표적 선진국이다. 군비지출은 12번째로 많으며, 인간 개발 지수에서 2위를 기록한 것을 비롯해, 오스트레일리아는 삶의 질, 건강, 교육, 경제적 자유, 시민적 자유와 권리의 보호 등 다양한 국가간 비교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G20, OECD, WTO, APEC, 국제 연합, 영국 연방, 앤저스(ANZUS), 태평양 제도 포럼에 가입되어 있다. 한편, 2012년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의 조사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나타났다.[1]

국명[편집]

정식 국호는 ‘오스트레일리아 연방’(Commonwealth of Australia)이며 한국어권에서 공식적으로 일컫는 국호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이다. 그러나 이름이 너무 길고 비슷한 이름의 오스트리아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아 대한민국에서는 한자 음역인 '호사태랄리아(濠斯太剌利亞)'를 줄인 호주(濠洲)라는 이름이 더 많이 통용되고 있으며 대한민국 주재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에서도 주한 호주 대사관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2]

어원[편집]

오스트레일리아라는 국명은 라틴어로 "남쪽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가상의 대륙인 테라 아우스트랄리스(Terra Australis)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영국 잉글랜드의 항해사 겸 지도 제작자인 매슈 플린더스(Matthew Flinders)가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817년에는 래클런 매쿼리 뉴사우스웨일스 총독이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지명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1824년에는 영국 왕립해군이 오스트레일리아라는 대륙 이름을 승인했다.

역사[편집]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는 몇만 년 전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원주민인 애버리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고대 인류와 DNA가 가장 비슷한 종족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자로 기록된 이 나라의 역사는 17세기경 네덜란드 탐험가들이 처음으로 이 나라를 목격한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1770년영국의 선장 제임스 쿡이 본격적으로 이곳을 탐험한 이래, 1901년 1월 1일에 영연방의 일원이 되었고 얼마 후에 군대가 창설되었다. 1931년 12월 11일부터 웨스터민스터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과의 접촉, 그리고 최초의 영국인 정착자들에 관한 문제들 등은 여전히 논란으로 남아 있다.

초기 역사와 발견[편집]

1813년까지 유럽인들의 오스트레일리아 항해 경로
     1606년 빌렘 얀스존     1606년 루이스 바에스 데 토레스     1616년 딕 하토그     1619년 프레더릭 드 하우트만     1644년 아벨 타스만     1696년 윌리엄 드 블라밍     1699년 윌리엄 댐피어     1770년 제임스 쿡     1797–1799년 조지 배스     1801–1803년 매슈 플린더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인 애버리진은 현재로부터 약 5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 바다가 얕아진 사이에 동남아시아로부터 배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도착하였다. 그 후 2~4만 년 간 간빙기가 오면서 다른 대륙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자신만의 문화를 구축하게 된다.

처음 17세기에 네덜란드의 모험가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자 연안 탐험을 실시하여 '새로운 네덜란드'라는 뜻의 뉴홀랜드(New Holland)로 명명했다. 유럽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했을 때 약 100만 명의 원주민(애버리진)들이 300여 개의 부족 국가를 형성하고, 이들 사이에서 적어도 250개의 언어 및 700여 개의 방언을 사용되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 부족들은 각자 고유한 토템을 갖고 있었으나, 드림타임에 대한 전승은 대개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인의 탐험 활동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사업의 일환으로서 실시되었는데 경비가 가중되고 이익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1699년 영국의 해적 윌리엄 댐피어가 뉴홀랜드의 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보고는 비관적인 것이어서 탐험 열기는 냉각되었다. 루이스 바에스 데 토레스 등의 탐험가가 그 일부를 바라본 데에 그치기도 하였다. 1769년 태평양에서의 금성 관측에 참가했던 제임스 쿡에 의해서 타히티, 뉴질랜드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의 탐험이 실시되어, 그곳의 일대를 ‘국왕의 이름과 국왕의 깃발 아래’ 점령하고, 뉴사우스웨일스(영국 웨일스에서 연유)라고 명명했다. 쿡은 그 보고서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농업 개발에 관해 적절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 때부터 이 땅이 하나의 대륙으로서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뉴사우스웨일스는 얼마 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남쪽 대륙인 테라 아우스트랄리스에서 유래된 오스트레일리아라고 불리게 되었다.[3]

영국의 죄수 폭증과 미국 독립 혁명(1776년)으로 인해 영국은 뉴사우스웨일즈 주에 새로운 유형(流刑) 식민지를 건설하기로 하였다. 1788년 1월 26일, 아서 필립이 이끈 11척의 배에 1500명의 인원이 탑승한 첫 함대가 시드니 항구에 도착하고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건설을 시작하였다. 식량의 자급 태세를 갖추는 일이 당초의 급선무였으나, 미지의 풍토에서 농업 경험자가 적었던 관계로 개발은 진척되지 않았다.[3] 마지막 죄수 호송인 1868년까지 약 16만 명에 달하는 죄수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호송되었다. 당시 영국의 왕은 조지 3세였다. 이와는 별개로, 1790년대부터 세계 각지에서 자유 정착민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국가로 독립[편집]

어느 정도 개발이 진척되자, 시드니 서쪽에 급사면을 맞대고 솟아 있는 동부 고지의 일부를 이루는 산들이 식민지의 전면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이 산들을 넘어가는 길이 발견되고, 산지 서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농목의 적지에 개발의 손이 뻗쳤다. 즉 1850년대골드 러시의 시대가 됐다. 배서스트, 벤디고, 밸러랫 등에서 발견된 금을 찾아서 사람들이 쇄도하였다. 빅토리아주뉴사우스웨일즈 주에서 시작된 금광 시대는 중국부터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1850년의 40만 인구는 10년 후엔 115만, 30년 후에는 223만으로까지 증가하였다.

직접 금을 찾는 사람 이외에 기술자·장사꾼도 모여들어 이 대륙의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 대륙 내에 성립되고 있던 6개 식민지간의 물자 교류 및 본국과의 교역도 왕성해졌다. 영국 식민지 총독은 가혹한 세금 및 결정을 내리고, 결국 1854년 유레카 감옥에서 광산 노동자들의 유혈 봉기가 일어난다. 이를 유레카 봉기라고 한다. 현재 멜버른에 있는 유레카 타워는 이 유레카 봉기를 기념한 것이다. 1880년대 시드니와 멜버른의 세련된 현재적인 모습은 이 금광 시대로부터 일어난 것이다.[3]

1901년 1월 1일뉴질랜드를 제외한 6개의 식민지 연합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로 독립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 아래 1901년, 20세기의 첫날을 기하여 각 식민지는 각 주로 재출발함으로써, 이 땅에 영연방(英聯邦) 내의 자치령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결성하였다.[3] 1942년 10월 9일에는 외교권과 국방권을 얻은 자치령에서 독립국으로 발전하였다. 1986년 3월 3일에는 독자적인 헌법도 마련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에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국민들 약 40만 명 정도가 참전하였고 그중 약 6만 명이 전사했다고 알려진다. 현재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단(ANZAC, 앤잭, Australia & New Zealand Army Corps)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제1차 세계 대전(61,928명 전사), 제2차 세계 대전(39,400명 전사), 한국 전쟁(339명 전사), 베트남 전쟁(520명 전사)에 참전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웬만한 동네에는 앤잭 언덕(Anzac Hill)이 있을 정도로 일상에 파고 들기도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매년 4월 25일을 앤잭 데이(Anzac Day)로 정하고 있다.

정치[편집]

Australian House of Representatives, 45th Parliament.svg

제30대 연방 총리 스캇 머리슨

이 나라는 영연방 소속국가들의 정치적 자율성을 보장한 1942년 웨스트민스터 법(Statute of Westminster Adoption Act 1942)에 따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국가원수이며, 오스트레일리아 의회의 추천을 받아 그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리는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헌법1986년 3월 3일에 제정되었다. 영국식 의회제도를 채택하여 상하 양원으로 구성되는 연방의회가 있다. 도시의 산업가 층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당, 지방의 농목업자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당이 3대 정당을 이룬다. 세계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최초로 내각을 조직한 일도 있다. 1996년 3월 총선에서는 야당인 자유·국민당연합이 압승했다. 현 총리는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케빈 러드 제26대 연방 총리로서, 2007년 11월 24일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존 하워드가 이끌던 오스트레일리아 보수연립에 승리하여 총리로 정식으로 취임하였고, 부총리 겸 교육노동장관 줄리아 길라드2011년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리더십 투표에서 승리, 총리직을 잠시 이끌었다. 2013년 6월 26일 2013년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2차 리더십 투표에서 케빈 러드가 재차 승리하여, 다시 총리직과 노동당 당수직에 재취임하였다. 2013년 9월 7일에 있었던 연방 총선에서는 야당인 자유국민당연합이 큰 차이로 승리함으로 야당 당수인 토니 애벗이 제28대 연방 총리로 취임하였다. 2015년 9월, 2년간 집권 중이던 토니 애벗 총리를 55 대 44로 누르고 맬컴 턴불이 제29대 신임 총리가 되었으나, 2018년 8월 24일 자유당 대표가 스캇 머리슨으로 교체되어 총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주 정부에 한정된 권한은 교육제도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상당히 크지만, 연방 전체에 관여하는 외교·국방·무역·금융 등은 연방정부의 권한에 속한다. 외교·군사면에서 전반적으로 모국인 영국의 영향이 후퇴하고 미국과의 유대가 강화되고 있다.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에 가맹했고, 베트남에 파병한 바도 있다.[4] 미국·뉴질랜드와의 사이에 공동 방위체제를 갖는 앤저스(ANZUS)조약을 맺고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국가(國歌)인 Advance Australia Fair(오스트레일리아여, 힘차게 전진하라!)는 1984년에 제정되었다.

국가체제 전환 논의[편집]

1999년, 폴 키팅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영연방 완전독립 지지자들의 요청으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이 나라의 군주제 폐지 및 체제 전환이 논의되었으나, 과반수(약 54%)가 전환에 반대하였다. "영국과의 우호" 및 (독립시 도입할) 정치체제간 갈등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2007년 1월의 여론조사(Newspoll 조사)에서는 45% 대 36%(19%는 무응답)로 공화국 전환에 찬성, 전세가 역전되었다.

연방상원[편집]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상원(The Australian Senate)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상위입법기관으로, 정식으로 연방에 가입한 6개 주에 12명씩, 그리고 준주지역에 2명씩 대표의석을 할당하는데, 각 주를 선거구로 놓고 경쟁하는 대선거구제 방식을 취하며, 정당득표수에 비례하여 의석을 배분하므로 군소정당에 다소 유리하다. 2007년 기준의 총의석수는 76명이다. 임기는 6년이며, 총선거마다 과반수(2009년 37석, 2007년 40석)가량의 의석을 교체한다. 현재 구성(정당별, 2011년까지 임기 기준)은 다음과 같다.

연방하원[편집]

호주연방하원(The Australian House of Representatives)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하위입법기관이다. 그러나, 상원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으며, 영국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다수당 지도자, 즉 연방총리가 국가를 실질적으로 통치한다. 연방하원의 소수당 지도자는 '범야권의 지도자'(Leader of the opposition)로서 총리와 상호간 정책토론을 하며 주로 대립각을 세우나, 간혹 중요 국가적 정책사안에서는 긴밀히 협력한다.

전체 의석수(2007년 현재 150석, 정부구성을 위한 과반수는 76석)를 각 지역별 인구에 비례하여 배분한다. 영국과 유사한 소선거구제이나,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 1번, 그 후 차선으로 지지하는 후보들에 번호(등급)을 매겨 모든 후보들에게 기표하는 '선호투표(제)'에서, 최초투표에서 과반이 넘는 지지를 획득했거나, 과반 이상 득표자가 없을 경우 최다득표를 기록한 '최후의 2인' 중 가장 많은 지지(1차투표에서 과반이상 득표-하면 그대로 당선-자가 없으면 2차선호, 3차선호 등을 거쳐 가장 많은 선호를 차지하는 경우)를 얻은 후보가 당선된다. 양당제 정치문화의 발전과 전체 유권자들의 의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는 유리하지만, 군소정당들에게는 매우 불리하다.

200711월 24일에 열린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1년간의 야당생활을 끝내고 케빈 러드가 이끄는 노동당이 집권(정권교체)에 성공하였다. 새 연방하원의회는 2008년 2월 12일에 업무를 공식 개시하였다.(그 최종 구성은 2007년 오스트레일리아 국회의원 총선거를 참조할것)

대외 관계[편집]

법률[편집]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2010년 경쟁 및 소비자 법(Competition and Consumer Act 2010)에서 광고에 대한 규제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2010년 경쟁 및 소비자 법[5] 은 오스트레일리아 의회가 제정한 법률이다. 2011년 1월 1일 이전에는, 1974년 거래관행법[6] 이 시행되고 있었다. 이 법은 경쟁법으로서, 경쟁과 공정한 거래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과 소비자 보호의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경쟁 및 소비자 위원회 (ACCC)가 동 법에 대한 행정기관이다. 동법은 사인들에게 소권(訴權)을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동법의 제2장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소비자 법(ACL)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법원이 이 법의 위반에 관한 민사소송 및 행정소송에 관한 관할권을 가진다.

행정 구역[편집]

오스트레일리아는 6개의 주와 2개의 준주, 6개의 특별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괄호는 약칭으로, 우편번호 등 오스트레일리아 국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많이 쓰인다.

준주

주요 도시[편집]


국방[편집]

1901년에 창립된 군의 정식 명칭은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Australian Defence Force, 약칭 ADF)'으로서 해군(Royal Australian Navy, 약칭 RAN), 육군(Australian Army), 공군(Royal Australian Air Force, 약칭 RAAF)을 아우르고 전체 병력은 약 51,000 여명에 이른다. 이 나라의 군사는 지원병제로 선발된다. 군병력의 거의 대부분은 국제연합의 평화유지 임무, 재난 구호, 국제적 무력 분쟁에 관여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예로는 동티모르솔로몬 제도 그리고 수단에 파병된 것을 들 수 있다.징집 가능연령 (16~49세) : 남자 499만여명,여자 417만여명이다.

  • 오스트레일리아 국방부 Australian Defence Force (ADF)
  • 병력 (2011년 기준) : 현역 59023명
    • 해군 : 현역 14215명, 예비역 2150명
    • 공군 : 현역 14573명, 예비역 2800명
    • 육군 : 현역 30235명, 예비역 16900명
  •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 Royal Australian Navy (RAN) - 2013년 취역한 54척의 함정으로 구성
    • 호위함(frigates) 12척
      • Anzac class(만재배수량 3600톤) 8척
      • Adelaide class(만재배수량 4100톤) 4척
    • 잠수함
      • Collins class 6척
    • 지원함
      • HMAS Choules (dock landing ship)
      • HMAS Tobruk (heavy landing ship)
      • Balikpapan class (heavy landing craft) 6척.
  •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 전투기
      • F/A-18A/B 71대, F/A-18F 24대
    • 지원기
      • 737 AEW&C 6대, Airbus A330 MRTT(공중급유기) 5대, AP-3C Orion(해상초계기) 21대, C-130J 12대, C-17A 6대, C-130H 8대

자연 환경[편집]

지리[편집]

적도 남쪽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은 동서 약 4,000km, 남북 약 3,200km에 이르며, 총 면적은 7,686,850km2로 세계에서 6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대한민국의 78배) 기복이 많지 않은 단조로운 평면형을 보이고 있다. 지형·지질상으로 보아 이 대륙은 동부 고지·중앙 저지·서부 고원(西部高原)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8] 오스트레일리아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본토 그리고 태즈메이니아 섬,그 외의 많은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7,617,930km2에 달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본토는 인도-오스트레일리아 판 위에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은 평균 고도가 340 미터로 전대륙 중 가장 낮다. 고도별 빈도 분포에서는 200~500 미터에 해당하는 면적이 42%에 이른다. 즉, 호주 대륙은 낮은 대지가 넓게 퍼져, 기복이 적다고 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동남쪽에는 남북 방향으로 고기 조산대의 그레이트디바이딩 산맥이 뻗어 있다. 최고봉은 수도 캔버라의 남남서 120 km 지점에 우뚝 솟은 코지어스코 산(2,230m)이다. 이 근처는 호주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지형으로 겨울에 눈이 오는 유일한 지형이기도 하다. 더욱 동쪽은 온난 습윤기후, 서안해양성 기후인 데다가 물을 찾기 쉬워 인구 밀도가 높다. 브리즈번, 시드니, 멜버른과 같은 대도시는 모두 이 지역에 분포해 있다. 대분수산맥의 서쪽은 건조한 스텝 기후의 대찬정 분지이지만,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오므로, 소, 낙타 그리고 양을 방목하고 있다. 대찬정 분지보다 더욱 서쪽은 그레이트샌디 사막,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 깁슨 사막 등의 사막이 퍼져있어, 인구 밀도가 매우 낮다. 노던 테러토리 준주 지역이다. 대륙의 서해안에는 퍼스가 있는 정도이다.

대륙의 북부는 열대우림 기후 또는 열대 계절풍 기후에 속하며, 카카두 국립공원으로 유명하다. 다윈이 중심이다. 산호초로 이루어진 그레이트배리어리프가 관광지로 유명하다. 케언즈가 이 지역의 관광 거점이다. 노던 준주에 있는 에어즈 락은 세계유산으로 인정된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그레이트디바이딩 산맥에서는 석탄이, 대륙의 북서부에서는 철광석이, 서부에서는 금이 산출한다. 대륙 북부에서는 보크사이트우라늄이 나온다.

그레이트배리어리프

동부 고지[편집]

동부 고지는 대륙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초승달 모양의 지역을 차지하며, 대륙의 속도(屬島)인 태즈메이니아 섬도 같은 성상(性狀)을 보이고 있다. 이 지역은 고기 조산대(古期造山帶)에 속하는 오래된 습곡산맥이 중평원 작용으로 완만한 지형을 보이는 파상지(波狀地)화하고, 그 후 제3기의 단층·요곡(撓曲) 등의 지각운동으로 융기한 곳이다. 고지라 해도 고도는 비교적 낮아 300∼1,000m 정도 되는 곳이 많으며, 앞서 말한 토지의 성격을 반영하여 정상부는 융기 준평원으로서 기복이 작은 고원상의 토지를 보인다. 그러나 가장자리, 특히 동쪽 가장자리에는 토지의 융기에 따라 회춘한 하천이 깊은 계곡을 파는 일이 많으며, 가파른 산곡 사면과 완만한 산정부를 갖는다.이 동부 고지는, 그 지리적 위치로 보면 현저하게 동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그 일련의 고지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남태평양 방향으로 유입하는 것과 서쪽의 중앙저지 방면으로 흐르는 것으로 나뉘므로, 그레이트디바이딩산맥이라고도 불린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알프스 산맥이라고 불리는 산지는 대륙의 남동부에 동부고지의 일각을 차지하며, 지루산지(地壘山地)로서 주변의 산지보다 한결 높아서 대륙의 최고부를 형성한다. 주봉 코지어스코 산은 해발 2,234m이며, 주변엔 빙하시대에 형성된 권곡(圈谷)이 존재하나. 알프스라는 이름에서 받는 고산형 인상과는 아주 먼 완만한 산형(山形)이 탁월하다. 이 부근은 일명 스노이 산맥(Snowy山脈)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설이 많고 한여름에도 잔설이 있으며, 대규모의 수자원 개발이 진척되고 있다.[9]

중앙저지[편집]

중앙 저지(中央低地)는 동서로 긴 대륙 전체에서 보면 동쪽으로 좀 치우친 위치에, 대륙의 북쪽 해안에 크게 만입하는 카펀테리아 만의 깊은 곳으로부터 대륙의 남쪽 해안에 완만한 호를 그리며 얕게 만입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만의 동쪽 가장자리 방면에 걸쳐서 대륙을 남북으로 횡단하는 일대 저지대이다. 해발고도는 200m 이하로 100m가 못되는 지역이 넓고, 에어 호(Lake Eyre) 주변에는 해수면 아래의 지역도 있다. 중앙 저지의 동남부·남부는 이 대륙에서 가장 큰 강인 머리 강(Murray), 달링 강(Darling) 수계의 유역이고, 북부는 카펀테리아 만으로 흐르는 여러 강의 유역인데, 중앙부에는 낮은 산맥에 의해서 달링 강 유역과 격리된 대규모의 내륙 유역이 있다.[10]

대찬정분지[편집]

대찬정분지: 중앙저지의 중앙부는 내륙유역으로서, 에어호에 구심적으로 유입하는 여러 강의 유역이 최대이며, 그 남쪽에는 프루움호 유역·토렌즈호 유역이 접해 있다. 내부유역의 하천은 말할 것도 없고 달링강과 같이 큰 하천까지도 유수를 보기가 드문 간헐천이 되고 있다. 지질적으로 보면 이 지역은 심한 지각운동을 받는 일이 없고, 고생대 말 이래의 지층이 퇴적되어 분지상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동부고지 방면에서 지표에 노출하는 다공질 지층은 중앙 저지의 중앙부에서는 지표하 수백m의 깊이에 존재하나, 동부고지 방면의 강수의 일부는 그 지층에 삼투(渗透)하여 중앙 저지대 방면에서 피압지하수(被壓地下水)로서 깊은 곳에 부존(賦存)하고 있다. 그래서 불투수층을 관통하여 대수층에 이르는 굴착우물에 의해서 지하수의 분출을 보게 된다.[11]

서부 고원[편집]

서부고원은 중앙 저지의 서쪽에 펼쳐진다. 면적상으로는 대륙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광대한 지역인데, 해발고도는 300∼700m이고, 전체적으로 기복이 거의 없다. 지질적으로는 선캄브리아 시대의 기저 암반으로 이루어지며, 오랜 지질시대를 거쳐 준평원화되어, 방패를 엎어 놓은 듯한 형태를 전체적으로 보이는 데서 오스트레일리아 순상지(楯狀地)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완전히 한결같다는 것이 아니라, 중앙부에서는 맥도넬 산맥이 돌출하고 해머슬리, 킴벌리, 바클리 등 대지(臺地)를 싣고 있다. 지역의 태반은 건조기후 아래 있으며, 북부지역·서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정해진 유로도 없고, 중앙저지에는 심프슨 사막, 중앙부엔 그레이트샌디 사막, 그레이트 빅토리아 사막이 펼쳐져 있다.[12]

에어호

기후[편집]

기후의 특색은 그 건조성에 있다. 내륙부는 물론 서쪽 가장자리에서 남쪽 가장자리의 바다에 접한 부분까지 반사막의 식생이다. 한편, 남회귀선이 국토의 중앙을 동서로 종단하고 있어, 위도상으로는 국토의 39%가 열대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기온이 높은 지역이 많다. 대륙의 동북 연안부는 무역풍의 영향으로 강우량이 많고 열대우림을 이룬다. 동남부는 온대 해양성 기후하에 있어 인류에게 쾌적한 기후환경을 보이며, 이 대륙에서의 인구분포의 중심지대를 이룬다. 대륙 남쪽 가장자리의 애들레이드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과 대륙의 서남지역은 온대 겨울비의 지중해성 기후이다.열대에 속하는 대륙의 북쪽 지역에는 우계와 건계의 교체가 뚜렷한 사바나 기후가 탁월하며, 내륙으로 감에 따라 사막을 둘러싸는 스텝기후(초원기후) 지역으로 변해 간다.[13]

식생[편집]

기후의 특성에 따라 식생에 특징있는 변화가 보이는데, 유카라아카시아는 가장 탁월한 수종(樹種)이다. 동물로는 캥거루, 코알라, 오리너구리, 가시두더지 등의 특이한 동물의 분포를 보이며, 이 오랫동안 격리되었던 대륙의 한 특성을 보여준다. 선사시대부터 오래도록 다른 대륙과 격리되어 오면서 호주의 동물계는 세계의 다른 동물과는 다른 계통을 따라 진화되었다. 그리하여 이 대륙에서는 유대류가 태반에서 태아를 키우는 포유동물을 대신하여 번성하게 되었다.오늘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흔한 유대류인 캥거루는 약 90종이 있는데, 크기가 2.5미터나 되는 붉은캥거루로부터 불과 20센티미터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쥐캥거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호주 고유의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캥거루도 초식동물이며, 성질이 온순한 코알라유칼립터스 나무 위에서만 산다. 예외적으로 ‘태즈메이니아 데블’이라고 하는 개처럼 생긴 육식동물이 있는데, 이 동물은 호주 본토에는 없고 섬에만 살고 있다. 오리 부리를 한 오리너구리는 알을 낳는 수생 포유동물로서 독특한 유대동물이다. 역시 호주에만 생존하는 이 동물은 두 종류의 바늘두더지(spiny anterater)와 더불어 다른 곳에서는 멸종된 포유동물의 한 목(目)으로서 유일하게 남아 있다.[13]

경제[편집]

Gold Coast skyline.jpg

오스트레일리아는 국토가 넓고 기후가 다양하여 천연 자원이 많다. 이 자원들을 그대로 해외에 수출하거나, 또는 이를 가공하여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등의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최근에는 관광 산업 또한 발전하고 있다. 이 나라의 이름을 들으면 곧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양·밀 및 원야(原野)에서 뛰어다니는 캥거루 등이다. 이것은 아무리 자원의 개발이나 공업화가 진척되어도 아직도 농목업이 이 나라 경제의 기반이 되어 있고, 경제활동의 분포는 인구분포와 마찬가지로 현저하게 대륙의 동남 지역에 편재하며, 원야인 채로 남겨진 공백의 토지로 태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옳은 일이다. 그러나 농목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최근 급격히 변해 가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14]

아르카링카 베이즌에 최대 2330억 배럴의 유전을 발견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유전 다음으로 큰 규모다. 유전의 가치는 약 20조 호주달러이며 한화로는 무려 2경3000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아직 수익성 석유가 개발될지는 미지수지만 원유 추출에 성공한다면 원유는 호주 전체가 자급자족하고 수출까지 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양이다.

발견된 호주 유전이 고대기에 형성됐으며, 석유와 천연가스를 머금은 화석화된 물질, 케로겐이 풍부한 것으로 조사됐다.

배럴당 100달러 선으로 움직이는 원유 1000억 배럴만 뽑아내도 엄청난 숫자임에 틀림없고 발견된 유전에서 최소 35억 배럴에 달하는 셰일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목축업은 이 나라 산업의 중심이다. 목양은 식민 당초부터 도입된 메리노종을 중심으로 하여 대륙 북부의 열대기후 지역과 중앙부의 극단적인 건조 지역을 제외하고 널리 행하여지고, 양모의 산출액은 세계 생산량의 3분의 1을 넘어 세계 제1위이다. 육우는 양보다도 고온인 대륙 북부지역이나 내륙에도 방목되며, 또한 연안부의 다습지역에도 분포한다. 젖소는 동부·남부의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인구 집중지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분포를 한다. 방목에 적합한 자연을 가진 넓은 국토, 과소한 인구로 하는 개발, 개발 초기 단계에서의 본국의 왕성한 양모의 수요, 대찬정분지의 지하수 개발, 냉동선의 발명 등에 의해서 오늘날의 이 나라의 목축은 발전해 왔다. 국토의 약 66%가 농목지인데 그중에 90%가 방목지이다.[15]

농업은 을 중심으로 하여 매우 왕성하다. 신식민지의 식량 자급을 목표로 하여 시작되었던 밀의 경작도 오늘날에는 세계 유수의 생산국으로서 알려져 있다. 총생산량은 27,410,100 톤(2011년, 세계 6위, 3.89%)이다.[16] 밀 지대는 최적의 자연적 조건을 갖는 지역에 합치하여 출현하였는데, 대륙 동남부·동부 고지의 내륙쪽을 따라서 분포하며, 또한 내륙 서남부의 일각도 차지하고 있다.[17]

광업에 관해 보면, 국토엔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각지에서의 금광 발견이 이 나라 경제 발전의 일대 계기가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밖에 납·아연·철·보크사이트·석탄·갈탄 등도 산출되며, 납은 세계 제3의 산출량이 있다. 광산자원 중에서 과거에 산출되지 않던 석유와 천연가스도 개발이 진척되어 채굴되고 있다.[18]

공업은 전반적으로 침체하고 있다. 1차산품을 수출하여 필요한 완성품을 수입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식민지에 공통된 현상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더욱 공업화가 촉진되어, 외부에서 보는 이 나라의 인상과는 반대로 공업생산액은 제1차산업의 생산액을 이미 넘어서고 있다. 기간산업으로서의 철강업과 급속히 발달한 자동차공업 등 중공업의 발전도 눈부시다. 그러나 자원의 편재·높은 임금·좁은 국내시장 등이 문제점으로 되어 있다.[19]

20세기 초기까지 수출의 70%는 영국 본국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마다 대영 의존도는 감소하여 1970년대에는 4% 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수입국에 있어서도 영국으로부터의 수입이 수입 총액의 40∼50%를 차지하였으나 1970년대에 23%로 떨어졌고, 최근에는 3% 이하로 그 비중이 크게 낮아졌다. 이에 대신하여 미국, 일본, 독일로부터의 수입이 증가하였고 EU 국가와 캐나다로부터의 수입도 늘었다.[20] 이후로는 아시아태평양 국가와의 교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증하여 2009년에는 중국, 일본, 대한민국이 가장 중요한 수출 상대국이었고, 수입에서도 중국으로부터의 금액이 가장 많아 오스트레일리아의 최대 교역 대상국은 중국이 되었다.

교통[편집]

넓은 국토 중에서 인구가 집중하고 경제활동이 왕성한 지역이 현저하게 편재하므로, 교통 사정도 이를 반영하여 지방에 따라서 교통로의 소밀(疏密)이 현저하다. 그리고 국토의 개발이 구식민지 이래의 전통에 따라서 독자적으로 행하여졌으므로, 철도 궤도의 폭이 각주마다 달라서, 주 경계에서 갈아타는 데 불편하다. 시드니-멜버른 간에 직통열차가 다니게 된 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자동차의 보유율이 높아서 자동차 교통이 매우 왕성하고, 국내 항공로도 현저하게 발달하여 국민 1인당의 항공기 이용률은 세계 제1위이다.[21]

사회[편집]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은 석기시대와 똑같은 수렵생활을 영위한 데 지나지 않았으며, 식민지 당국은 그 노력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원주민 인구는 크게 감소하여 순혈종의 원주민 약 4만 명이 특별보호구에서 보호 생활을 보내고 있다. 따라서 이 나라의 주민 구성을 생각할 때 원주민은 현실적으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결과 이 나라의 주민은 모두 최초의 선대 이래 도래한 사람들이며, 현재 총인구 약 1,973만 중 96%가 유럽계 백인으로 구성되어 명실공히 ‘백인의 천하’라 해도 좋겠다. 그중 영국계가 압도적으로 많아 90%를 차지한다. 오랫동안 이민에 의한 인구 증가를 꾀해 왔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급속한 자원 개발, 경제 성장을 목표로 하고, 또한 1930년대의 낮은 출생률에 기인하는 인구 구성의 틈을 메우기 위해서 이민 수용정책이 채용되었다. 이탈리아·그리스·네덜란드·독일 등지로부터의 이민이 많다. 한편 골드러시 때의 중국인 채광부와의 사이에 일어난 노동력의 덤핑·생활 정도의 저하 등의 문제가 얽혀서 발생한 백호주의 정책이 최근까지 채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세계 여론과 아시아로 눈길을 돌린 이 나라의 입장 등으로 백호주의 정책이 파기되었다. 국어는 영어이다.[3]

복지국가[편집]

오스트레일리아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된 복지국가이다. 사회보장제도는 고령자·신체장애자 등에 대한 연금과, 실업자·병약자·자녀가 있는 가정에 대한 수당 등이 있다. 그 밖에 여러 복지단체에 대해서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또 주택정책이 잘 되어 있어 2008년 기준으로 호주의 주택 보급률은 70%를 조금 웃돌아 세대의 약 25%의 정도는 임대주택에 거주하고 있다.[22] 영국계 주민이 많고, 영연방의 하나인 탓에 생활양식이 영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

여가 활동[편집]

대다수의 호주인들은 퇴근 후 집에거 맥주를 마시는 것을 하루 중 가장 큰 낙으로 생각한다. 크리켓·론 볼링·럭비 등의 스포츠가 활발하다. 이 외에도 골프나 경마, 수상 스포츠, 캠핑을 즐기고, 일요일 오후에는 지역적으로 있는 ‘아르보(오후라는 뜻)’라는 정원 맥주파티에서 서로 어울린다.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흔히 예고없이 친구와 친척집을 ‘잡담하러’ 방문하는 관습이 있고, 시골에서는 남녀가 따로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느긋한 옥외생활의 분위기는 먹는 일과 그 사회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이곳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식 바비큐라는 요리를 항시 즐기게 되었다. 많은 공원이나 해변가에서는, 점심때나 저녁식사시간이면 불에 굽는 스테이크와 갈비 소시지의 냄새가 환담소리와 맥주 깡통 비우는 소리와 어울려 은은히 새어 나온다. 야외식사의 풍습은 ··바닷가재, ‘야비’라고 하는 민물가재 등을 파는 거리의 노점에서도 성행되고 있다. 도박도 널리 행해져 대규모 사교클럽이 인기가 있고, 행락을 위하여 해외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노동인권[편집]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노동조건을 몇 가지 갖고 있다. 그들은 일년에 4∼5주의 휴가와 연중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다수의 공휴일을 확보하고 있다. 또, 크리스마스부활절 외에,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농업전시회, 여왕의 생일, 그리고 멜버른 사람인 경우에는 이 나라 최대의 경마행사인 ‘멜버른 컵’ 경기 때도 근무를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일찍 근무를 시작하여 오후 5시면 끝마침으로써, 몰려오는 파도 옆의 백사장에서 본격적으로 일광욕을 하는 등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만들고 있다. 오늘날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풍경의 하나는, 태양에 바랜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십대의 젊은이들이 풍요와 넘치는 영양, 그리고 야외생활로 다져진 건강한 피부빛의 육체들을 가지고 서프보드와 윈드서핑 장비가 꽂힌 캠프용 자동차 주위에 모여 있는 모습이다.[23]

민족[편집]

애버리진이 사용하는 도구

영국계가 주류이지만 다양한 민족이 존재하며, 원주민 보호 구역에는 예전부터 거주하던 어보리진도 분포한다. 태즈메이니아지역의 애버리진은 호주가 영국식민지가 되면서 백인들의 '인간사냥'으로 전멸당하고 말았으며, 호주의 애버리진들도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약 40년간의 호주정부의 원주민 말살정책으로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백인 가정으로 입양당하거나 강제수용당했다. 원주민들의 인권을 짓밟은 호주정부의 원주민 탄압정책은 《리더스 다이제스트한국어판에 강제수용당한 원주민 소년이 탈출하여 고향에 돌아온 이야기가 실릴 만큼 지식인들의 지탄을 받았으며, 애버리진들도 불행한 자신들의 과거를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또는 '도둑맞은 아이들'(Stolen Children)이라고 부를 만큼 큰 상처를 받았다. 강제 입양이나 수용당한 원주민 어린이들은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데, 일부는 법정투쟁을 하여, 2007년 9월 1일 호주 역사상 최초로 보상결정이 내려졌다.[24]

2007년까지 재임한 존 하워드 정권에서는 호주정부의 민족말살정책이 이전정권의 일이었다는 이유로 애버리진에 대한 사과나 보상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으나, 2007년 12월에 집권한 케빈 러드 행정부2008년 2월 13일, 범정부차원의 첫 번째 공식사과문을 발표하고 이를 연방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적극적인 사죄활동을 시작했다.[25] 이는 호주정부가 "잃어버린 세대"로 불리는 정부주도의 토착민 가정및 사회 파괴행위에 대해 사죄의 뜻을 밝힘으로써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보였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1973년까지 백호주의를 고수하여 흑인의 이민을 제한하였으나, 노동력 부족 등의 문제가 나타나자 1973년에 백호주의를 전면 폐지하였고, 그 뒤로 인종 차별은 줄어들었다.

언어[편집]

대부분의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영어를 쓰고 있는데, 호주 영어 (오지 잉글리시)는 미국 영어영국 영어와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2001년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80%는 가정에서 영어만을 사용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가정에서 많이 쓰이는 언어는 중국어(2.1%), 이탈리아어(1.9%), 그리스어(1.4%) 순이다. 이민 1세대나 2세대의 상당수는 두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베트남계 이주민은 베트남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영어 구사자도 있다. 일례로 동남아시아에 온 주민은 베트남에서 온 주민처럼 고향 언어를 사용하는 점이랑 영어를 같이 구사하는 점도 있는 편이다.

처음 유럽인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약 200에서 300 개의 토착 언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약 70개 정도만 살아남아 있으며, 그중에 20 개는 사멸 위기에 놓여 있다. 이들 토착 언어를 주로 사용하는 인구는 약 5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0.02%이다.

종교[편집]

종교구성 (오스트레일리아)
가톨릭
  
25.3%
성공회
  
17.1%
그 외 기독교
  
18.7%
불교
  
2.5%
이슬람교
  
2.2%
힌두교
  
1.3%
유대교
  
0.5%
기타
  
0.8%
무종교
  
22.3%
무응답
  
9.4%

오스트레일리아는 국교가 없는 세속국가이다. 호주 헌법 제 116조에는 어떤 종교를 확립을 위해 종교의식 강요,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률을 금지하고있다. 2011년 인구 조사에서 호주인의 61.1 %가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었다, 로마 가톨릭25.3 %와 호주성공회 17.1 %를 포함하여; 인구의 22.3 %가 종교가 없는 무종교인 이었고, 7.2 %는 비 기독교 종교와 이슬람교 (2.2 %), 힌두교 (1.3 %), 유대교 (0.5 %), 불교 (2.5 %)순이었다. 인구의 9.4 %, 나머지는 적절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았다.[26]

문화[편집]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오스트레일리아는 수백 개의 국립공원만큼이나 다채로운 축제와 행사가 벌어지는데 마디그라 축제, 패션축제, 애들레이드 예술축제, 캔버라 꽃축제, 포도축제를 비롯하여 요트경기·자동차 경주·경마경기 등이 사랑을 받고 있다. 오팔과 진주가 유명하며 독특한 호주 원주민 예술로 관광들에게서 많은 사랑과 관심을 얻어내고 있다.[23] 시드니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는 전 세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국가 종교가 없으며, 오스트레일리아 헌법 조항 166조는 "호주 연방정부가 그 어떤 종교를 수립하고, 그 어떤 종교적 의식을 시행하는 것 또는 그 어떤 종교의 자유적인 활동을 금지"한다.

호주의 주요 종교는 기독교 교파인 오스트레일리아 성공회로마 가톨릭이며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갖고 있다. 실례로 2006년 호주 노동당에서 성공회로마 가톨릭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학교내 종교 교육을 허용하는 법안을 제시했다가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다. 또한 정신과 의사출신의 작가인 콜린 매컬로의 소설 가시나무새들도 로마 가톨릭을 일부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교육[편집]

영연방 국가인 호주의 정규 대학 학사 과정은 일반적으로 영국과 같이 3년제를 유지하고 있다. 석사 과정의 수료는 1~2년이, 박사 과정은 4~5년이 요구되는 것이 보통이다.

스포츠[편집]

호주식 축구럭비 리그, 크리켓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2004년엔 8개 팀으로 프로 축구 리그인 A-리그가 창설되었다. (현재 현대 A-리그에는 10개 팀 (그 중 하나는 뉴질랜드에 연고를 두고 있다.)이 있다.) 올림픽1956년 (멜버른 올림픽)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2번 연 적이 있었다. 크리켓 월드컵 4회 우승이라는 전력을 가지고 있다.

주요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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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싱가포르 전경, 에스플라네이드 극장, 식물원, 머라이언, 스리 마리아만 사원, MRT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싱가포르 전경, 에스플라네이드 극장, 식물원, 머라이언, 스리 마리아만 사원, MRT
Flag of Singapore.svg Coat of arms of Singapore.svg
국기 국장
표어 Majulah Singapura
前进吧, 新加坡
சிங்கப்பூர் முன்னோக்கி
Onward Singapore
(전진하는 싱가포르)
국가 전진하는 싱가포르
Singapore on the globe (Southeast Asia centered).svg
수도 싱가포르 북위 1° 17′ 00″ 동경 103° 50′ 00″ / 북위 1.283333° 동경 103.833333° / 1.283333; 103.833333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의 도시 국가이다
싱가포르
정치
공용어 영어, 말레이어 (국민어), 표준 중국어, 타밀어
정치체제 공화제, 단일국가, 의원내각제
총통 할리마 야콥
총리 리셴룽
역사
독립 영국,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
 • 영국으로부터 독립
 •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
1963년 8월 31일
1965년 8월 9일
지리
면적 718.3km2 (190 위)
내수면 비율 1.444%
시간대 CST (UTC+8)
DST (없음)
인구
2015년 어림 5,469,700명 (115위)
인구 밀도 6,389명/km2 (3위)
경제
GDP(PPP) 2012년 어림값
 • 전체 3,275억$ (38위)
 • 일인당 61,046$ (3위)
HDI 0.895 (18위, 2012년 조사)
통화 달러2 2 브루나이 달러와 1:1 등가 협정
(SGD)
기타
ISO 3166-1 702, SG, SGP
도메인 .sg
국제 전화 +65 ¹

¹ 02는 말레이시아에서 전화를 걸 때 사용하는 번호이다.

좌표: 북위 1° 17′ 00″ 동경 103° 50′ 00″ / 북위 1.283333° 동경 103.833333° / 1.283333; 103.833333 싱가포르 공화국(말레이어: Republik Singapura 레푸블릭 싱아푸라[*], 영어: Republic of Singapore 리퍼블릭 오브 싱어포어/싱거포어[*], 중국어 간체자: 新加坡共和国, 병음: Xīnjiāpō Gònghéguó 신자포 궁허궈[*], 타밀어: சிங்கப்பூர் குடியரசு 싱가푸르 쿠디야라수), 줄여서 싱가포르(말레이어: Singapura 싱아푸라[*], 영어: Singapore 싱어포어/싱거포어[*], 중국어 간체자: 新加坡, 병음: Xīnjiāpō 신자포[*], 타밀어: சிங்கப்பூர் 싱가푸르)는 동남아시아, 말레이 반도의 끝에 위치한 섬나라이자 항구 도시로 이루어진 도시 국가이다. 북쪽의 조호르 해협과 남쪽의 싱가포르 해협을 두고 각각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약간 분리되어 있다.

1819년 영국동인도 회사가 현 싱가포르 남부에 개발한 항구가 시초이다. 1963년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1965년말레이시아 연방 정부와의 다툼 끝에 결국 연방을 탈퇴하여 독립 국가가 되었다.

독립 당시 인구는 160만명이었으나, 꾸준히 늘어 2010년에는 520만명에 이르렀다. 20세기 후반에 초고속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 중 하나로, 싱가포르 항구는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항구 중 하나이며, 정유시설과 금융산업은 세계에서 각각 3, 4번째로 크다. 2010년 싱가포르의 경제 성장률은 15%로 아시아에서 가장 높았다.[1] 같은 해, 싱가포르 넓이의 500배에 달하는 옛 종주국인 말레이시아를 총 경제 규모로도 추월하였다.[2]

2011년 기준으로 1인당 명목 국민소득은 5만달러, PPP 환산 국민소득은 6만달러에 달하며, 1인당 외환보유고는 세계 최정상권이다. 싱가포르의 면적은 692.7km2한국서울보다 조금 더 넓고, 인구는 서울의 절반 정도인 567만명(2015년 말 기준)이다. 인간개발지수는 전 세계에서 11위, 아시아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편이다.

역사[편집]

싱가포르에 관하여 역사적인 기술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3세기의 중국 문헌으로, "Pu-luo-chung"[주 1] 이라고 나온다.[3] 7세기 이후 스리위자야 제국에 속하며 자바어로 "바다 마을"이라는 뜻의 어촌 "트마섹"(Temasek, Tumasek)이라 불리었다.[4] 복수의 항로가 합류하는 말레이반도의 끝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이 더해져 다양한 나라의 선박이 기항하는 등, 테마섹은 중요한 무역도시로 떠올랐으나, 이후 14세기 경에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16세기와 19세기 사이에 싱가포르는 조호르 술탄국의 일부였다. 1617년 말레이시아-포르투갈 전쟁 중에 포르투갈 군대가 싱가포르를 불태운 이후, 16세기 동안에는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으며 17세기에는 네덜란드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하지만 이때는 그저 어민과 가끔씩 해적들이 나타나는 지역이었다.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의 상

1819년 영국 동인도회사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 경이 이 지역에 상륙하여 조호르의 술탄과 계약을 맺고, 싱가포르를 국제 무역항으로 개발하였으며, 이때부터 크게 성장하였다. 영국의 인도 정부가 1858년부터 이 지역을 관할하였으며 1867년부터는 정식으로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1869년까지 싱가포르의 인구는 100,000명에 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 군대가 말레이시아를 침공(싱가포르 전투)하여 점령하였다. 6일간 영국군은 치열한 방어를 하였으나, 1942년 2월 15일 항복을 한다. 일본은 싱가포르를 쇼난(昭南)으로 개명하고 1945년 9월 12일 일본이 항복한 후 영국군이 탈환할 때까지 지배했다.

1959년리콴유(Lee Kuan Yew) 수상과 유솝 빈 이스학(Yusof bin Ishak)에 의해 자치주가 되었으며, 1963년에는 말레이시아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인구의 대부분이 중국계인 싱가포르와 인구의 대부분이 말레이인인 말레이시아와의 마찰로 2년 후 독립하게 되고, 1965년 8월 9일 독립 국가로서 새로운 국가를 시작하였다. 리콴유가 초대 총리로 집권하였다.

새로운 국가로서 싱가포르는 당면한 실업과 자급자족의 문제가 심각했다. 그러나 1959년 6월 5일부터 1990년 11월 28일까지 리콴유의 장기 집권 기간 동안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어 홍콩에 버금가는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리콴유 내각 주도의 경제 사회 정책과 관련된 집행들은 공산주의보다 더 강하고 완고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 11월 28일고촉통(Goh Chok Tong)이 총리직을 이양받았으며, 2004년 8월 12일에는 리콴유의 맏아들인 리셴룽(Lee Hsien Loong)이 2006년 5월 6일2011년 5월 7일2015년 9월 11일에 실시하는 싱가포르 총선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3, 4, 5, 6대 총리로 다시 임명이 되면서 현재까지 내각을 이끌고 있다.

자연 환경[편집]

지리[편집]

싱가포르 식물원

싱가포르는 6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레이시아조호르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북쪽은 조호르-싱가포르 코즈웨이를 통해, 서쪽은 투아스 제2 연결점에 연결되어 있다. 주롱 섬, 풀라우 트콩, 풀라우 우빈, 센토사가 주요 섬이며, 가장 높은 산은 부킷 티마 힐로 해발 166미터이다. 본섬의 중심에 위치한 싱가포르 강의 남쪽이 원래 도시의 발당이었으며 현재는 다운타운 코어로 불린다. 이전에 그외 지역은 농장과 열대우림이었으나, 현재는 새로운 도시의 확장과 함께 거주와 쇼핑 그리고 산업단지로 바뀌었다.

싱가포르는 계속적인 간척 사업으로 1960년대에는 581.5km2의 면적에서 현재는 719.1km2로 확장되었다. 이는 서울(605.25km2)보다 약간 큰 면적이다. 2030년까지 100km2를 더 확장하는 것이 정부의 목표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작은 섬이 본섬과 연결되었는데, 주롱 섬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기후[편집]

기후는 연중 고르게 아침 최저 23℃에서 낮 최고 32℃를 보인다. 연평균 강수량은 2343.1 mm 정도이며 11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 강수량이 많은 편이다.

접기싱가포르의 기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최고기온 °C (°F) 30.1
(86.2)
31.1
(88)
31.6
(88.9)
31.7
(89.1)
31.6
(88.9)
31.3
(88.3)
30.9
(87.6)
30.9
(87.6)
30.9
(87.6)
31.1
(88)
30.6
(87.1)
29.9
(85.8)
31.0
(87.8)
평균최저기온 °C (°F) 23.3
(73.9)
23.6
(74.5)
23.9
(75)
24.4
(75.9)
24.8
(76.6)
24.7
(76.5)
24.5
(76.1)
24.4
(75.9)
24.2
(75.6)
24.0
(75.2)
23.7
(74.7)
23.4
(74.1)
24.1
(75.4)
평균 강우량 mm (인치) 242.5
(9.55)
162.0
(6.38)
184.8
(7.28)
178.8
(7.04)
171.8
(6.76)
161.2
(6.35)
158.3
(6.23)
176.2
(6.94)
169.7
(6.68)
193.9
(7.63)
255.7
(10.07)
288.2
(11.35)
2,343.1
(92.26)
평균강우일수 15 11 14 15 14 13 13 14 14 16 19 19 177
평균 월간 일조시간 173.6 183.6 192.2 174.0 179.8 177.0 189.1 179.8 156.0 155.0 129.0 133.3 2,022.4
출처 #1: National Environment Agency (Temp 1929-1941 and 1948-2009, Rainfall 1869-2009, Rain days 1891-2009) [5]
출처 #2: Hong Kong Observatory (sun only, 1982—2008) [6]

정치[편집]

싱가포르 의회
싱가포르 대통령 집무실, 더 이스타나

국가의 정체성[편집]

성문헌법을 가진 영국식 의회 정부의 공화국으로, 행정권이 내각에 있는 의원 내각제이다. 총리가 모든 권한을 위임 받고 내각을 이끌고 있다. 1991년 개정된 의회의원 선거법에서 복수정당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적 투표로 의회가 구성되게 되었다. 다만 의회는 인민 행동당의 영향력이 크다.

정당[편집]

1959년부터 현재까지 리콴유가 이끌었던 보수주의 정당인 인민행동당이 여당으로 집권하고 있다. 야당으로 싱가포르 노동자당, 싱가포르 민주당, 싱가포르 민주연합 등의 많은 정당들이 있으나 여당의 장기 집권과 강력한 정권의 힘(검열, 게리멘더링(선거구 조작), 민주화 운동 탄압)으로 존재가 미미하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국가보다 더 강력한 독재국가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인민 행동당의 강력한 독재 체제에 야당들은 정치적인 역할이 엄청 약하기 때문에 보수주의적 일당 독재를 할 수 있으므로, 싱가포르 의회는 오직 인민 행동당의 정권 장악력이 크다는 것이다.

행정 구역[편집]

크게 서부, 북부, 북동부, 동부, 중부의 5개 지역으로 나뉘며 퀸즈타운, 센트럴에리어 등 66개 도시 계획 구역으로 이루어진다.

사법[편집]

싱가포르의 모든 사법적 권한은 싱가포르 헌법에 의해 대법원과 그의 부속 법원에 부여되어 있다. 대법원은 항소심법원(the Court of Appeal)과 고등 법원(the High Court)으로 구성되며 항소심 법원은 형사 및 민사 사건의 항소심을 수행하고, 고등 법원은 형사 및 민사 사건의 원심과 상소심을 수행한다.[7] 대법원장, 항소심 판사, 사법 위원(Judicial Commissioners)과 고등법원 판사는 총리가 제청한 후보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 총리는 판사를 추천하기 전에 대법원 판사와 협의하여야 한다.

헌법에 의해 사법권은 대법원에 있으나, 인민행동당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는 비판도 있다.

법률[편집]

싱가포르의 법은 대영제국과 영인도의 법 그리고 영미법(코먼로)에 기반하고 있으나,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은 다민족 · 다종교 사회인 싱가포르의 국익을 이유로 서양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그대로 따르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부분(표현의 자유)은 제한하고 있으며, 수많은 무거운 벌금 체계가 존재한다.[8]

특히, 현재까지 태형이 존재하는 몇 안 되는 국가이며, 엠네스티에서는 싱가포르를 사형률이 높은 나라 중 하나로 보고 있다. 1994년 공공기물파손죄를 지은 미국인 소년 마이클 페이에 대한 태형 논란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기까지 하였다.[9]

싱가포르의 태형은 심장병이 없는 50세 이하의 남성을 대상으로 3대에서 24대[10]까지 때리며 21세기 들어서는 기계로 때리기도 한다.

국방[편집]

징병제 시행 국가로 2년동안 복무하며, 이후 40세까지 예비군으로 복무한다. 정규군 7만1천600명과 예비군 35만명으로 이뤄져있다. 말레이시아의 침공가능성을 항상 우려하여 국방에서는 신경을 많이 쓴다. 싱가포르 공군의 경우 자국 영토의 협소함과 유사시 전력이 한꺼번에 망실되는 것을 방지하는 목적 및 다국적 훈련교류 차원에서 해외 우방국들과 교류협정을 맺어 자국 공군의 일부 항공기 전력들을 주둔시키고 있다. 싱가포르 공군은 새 기종을 도입 할 때 마다 당대 최신기종을 도입하여 질적으로 최고를 추구하고 전략적으로도 위기사항이 닥치면 수동적인 방어태세보단 능동적인 선제공격 작전을 구사하는 능동적인 엘리트 공군을 추구하고 있다.

  • 프랑스 Cazaux 공군기지 주둔 A-4SU 공격기 4기, TA-4SU 공격기 7기
  • 미국 Mountain Home 공군기지 주둔 F-15SG 전폭기 10기 (마운튼 홈 미공군 기지 소속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수직미익에 미공군기들과 같이 마운튼 홈을 뜻하는 MO라는 글자가 있다.)
  • 미국 Luke 공군기지 주둔 F-16C 전투기 8기, F-16D 전투기 6기 (컨포멀 탱크와 전자전 장비가 내장된 도설 스파인 등을 장비해 Block60에 준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기에 Block52+ 라고도 한다.)
  • 미국 Silverbell 육군헬기장 주둔 AH-64D 공격헬기 8기
  • 미국 Redmond Taylor 육군헬기장 주둔 CH-47SD 수송헬기 6기
  • 호주 Oakey 육군항공센터 주둔 AS532UL 수송헬기 12기
  • 호주 Pearce 공군기지 주둔 PC-21 훈련기 19기

F-5S 전폭기,E-2C 조기경보기,G-550조기경보통제기,포커50(해상초계기,수송기 2가지 용도로 운용중),KC-135R 공중급유기 6대,KC-130B/H 공중급유기,C-130H 수송기,AH-64D 공격헬기,AS-332/532 헬기,CH-47SD 수송헬기,F-5T 훈련기,M-346 전술입문기,PC-21,A/TA-4SU 훈련기,S-70 해상작전헬기(해군 항공대 운용),A-4SU 공격기는 F-15SG 전폭기에 밀려 이제는 1선 전력에서는 물러나고 있다.

대외 관계[편집]

일본과는 2002년 초 전면적인 경제협력협정인 "일-싱가포르 신시대 경제동반자협정(日本・シンガポール新時代経済連携協定, Japan-Singapore Economic Agreement for a New Age Partnership: JSEPA)"을 체결했다. 이로써 싱가포르는 일본에게 최초의 자유무역협정 대상국이 되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의 동남아순방(2002년 1월)에 맞춰 체결된 JSEPA는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제거하는 자유무역협정(FTA)을 포괄하고 금융, 정보통신기술, 인재 양성 등의 분야를 포함하고 있다. 양국 무역량의 98% 이상에 상당하는 품목의 관세가 철폐(2000년 금액 기준)되어 일본의 싱가포르 수출은 무관세, 싱가포르의 대일 수출은 94%가 제로 관세를 적용받게 되었다.[11]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는 1973년 협정을 기본으로 2005년까지 바탐 섬 북부 지역에 관한 분쟁을 완결하기로 합의한 상태이다.[12]

대한민국과의 관계[편집]

대한민국은 1970년 12월 싱가포르에 통상경제대표부를 개설했다. 이 대표부는 1971년 7월 총영사관으로 승격되었다가 1975년 8월 대사관으로 승격됐다. 양국은 1972년 항공협정을 체결했다. 1979년 11월에는 이중과세방지협정이 체결되었다. 특히 건설업계의 교류가 활발한데 싱가포르창이국제공항을 비롯한 많은 주요 건물을 한국 건설업체가 건설하였다.

양국은 서로 10위권 내의 교역 상대국이며, 주로 전자전기제품, 기계류가 수출입 품목이며, 특히 1998년 외환 위기 이후 한국에의 투자가 많이 이루어졌다. 2000년에 정점을 이루다가 줄어들었으나 현재는 다시 늘어나는 추세이다. 대한민국의 대(對)싱가포르 수출은 152억4420만USD, 싱가포르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78억4953만USD(각 2010년)에 달하여, 싱가포르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5위의 수출국, 제14위의 수입국이다.[13]

특히 싱가포르 투자청(GIC, Government of Singapore Investment Corporation)은 1999년 잠실 시그마타워, 2000년에는 프라임타워, 서울파이낸스타워, 무교빌딩, 코오롱빌딩 등의 대형 부동산을 매입했으며, 2005년에는 서울 역삼동의 45층짜리 스타타워빌딩을 매입하였다. 이러한 한국의 부동산 투자 과정에서 탈루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현재 한국인 선수들이 싱가포르 축구 리그에 진출해 있다.

경제[편집]

오차드 로드

싱가포르의 경제정책은 국가에서 통제하는 권위주의자본주의이다. 2009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은 1770억$로 43위의 해당하는 경제규모이며, 1인당 GDP는 37000$가 넘는 부유한 국가이다. 싱가포르는 고도로 발달된 시장 기반 경제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수출입 무역에 의존하여 발달하여 왔다. 제조업도 발전한 편인데, 2005년 기준으로 국민총생산의 28%가 제조업으로부터 나왔다. 주요 생산품은 전자, 석유화학, 기계공학과 의약품 제조이다.

싱가포르는 런던, 뉴욕, 도쿄에 이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외환시장을 가지고 있으며, 사업가들에게 가장 친화적인 정책과 환경으로 평가 받고 있다. 홍콩, 대한민국, 중화민국과 함께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NIEs)으로 불리곤 한다.

싱가포르는 관광산업으로도 유명한데, 2013년에는 1 500만 명의 관광객이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2005년에는 관광산업을 진흥하기 위해 도박을 합법화시켰으며, 마리나 사우스와 센토사 섬에 새로운 테마파크를 세우는 계획을 하고 있다. 또한 싱가포르 음식 축제, 칭게이 축제 등의 관광 이벤트를 추진하고 있다.

2001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GDP가 2.2% 떨어지는 어려움을 겪게 되자 2001년 12월에 경제검토위원회(ERC, The Economic Review Committee)를 세우고 경제에 다시 활력을 심어주기 위한 정책 수정을 제시하였으며, 이로부터 침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2004년에는 8.3%, 2005년에는 6.4%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조사자료 등에 따르면 싱가포르 정부는 상당히 효율적이고 청렴도가 높은 편이며 투명한 시장 경제를 지지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1960년대부터 시작한 주택개발위원회에 의한 “플랫”(Flat)이라고 불리던 대규모 정부 공급 아파트 정책이나 경쟁력이 우수한 교육 시스템이 유명하다. 미디어, 사회간접시설, 교통 등 대부분의 지역 경제는 정부 소유의 회사가 주도하고 있다.

한국의 부가가치세와 비슷한 싱가포르의 상품 및 서비스 세금(GST, Goods and Services Tax)는 1994년 4월 1일부터 3%로 부과되었다. 이를 통해 16억 달러의 정부 재원을 조달할 수 있었다. GST는 2003년에는 4%, 2004년에는 5%로 인상되었으며, 2007년 7월 1일부터 7%로 인상되었다. 싱가포르의 고소득자 소득세율은 약 20%다.

싱가포르 도심 파노라마

교통[편집]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국제 교통 허브로, 많은 항공 및 해운 노선이 이곳을 지난다. 차량은 말레이시아와 마찬가지로 좌측통행을 한다. 홍콩처럼 땅이 좁아서 자동차 소유자에게 매우 높은 세금을 매기고 있으며, 자동차 구입 비용 또한 세계에서 가장 높아 인구는 500만명 가까이 되지만 자동차는 65만대가 등록되어 있다. 대한민국이나 일본과는 항공기로 연결되어 있다.

항만[편집]

항공[편집]

철도[편집]

이스트 코스트 파크에서 본 싱가포르.

사회[편집]

싱가포르는 미국처럼 이주민이 건설한 이민국가이면서,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가족관이 유지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시부모나 나이 드신 분을 모시고 살거나, 실직하여 생계를 잇기 힘든 남자 형제를 도와주고 고아가 된 조카를 입양하는 것이 전통적 가치관으로 여겨진다.[14]

주민과 이민 정책[편집]

머라이언

민족별로는 중국계가 전체 인구의 74%를 차지하며, 말레이인이 13%로 두번째로 많다. 그 밖에 영연방 출신인 인도인(주로 타밀인 출신) 등의 여러 민족이 거주한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국가에서 이민을 장려하고 있으며, 한 해에 태어나는 싱가포르의 아기보다 이민으로 유입되는 새로운 시민의 숫자가 더 많다. 특히 향후 싱가포르의 국가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체류비자나 취업비자, 영주권을 얻기가 다른 나라에 비해 쉬우며 투자 및 사업 이민의 경우 100% 외국인 투자가 가능하다.

언어[편집]

공용어말레이어, 영어, 중국어, 타밀어가 있으나, 사실상 영어가 유일한 공용어 역할을 한다. 말레이시아와 긴 역사 때문에 말레이어국민어로 지정되어있다. 타밀어를 공용어로 한 이유는 단순히 타밀인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일상적인 경우에도 영어를 많이 쓰는 편이며, 특히 직장에서는 영어 혹은 중국어가 많이 쓰인다. 하지만 중국어의 경우는 광둥어(광동어)나 다른 지역 중국어 사투리를 구사하는 인구가 많기 때문에 중국계 싱가포르인 사이에서도 영어가 많이 쓰인다. 그래도 대부분 표준 중국어(보통어/북경어)를 쓰는 편이다.

영어가 많이 쓰이긴 하지만 싱글리시라는 일종의 싱가포르인이 구사하는 사투리가 있기도 하다. 이 싱가포르식 영어는 아시아 국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유럽에서 쓰는 영어나 미국에서 쓰는 영어와 약간 차이가 있다. 싱글리쉬는 영국식 영어를 기반으로 중국이나 말레이식 억양에 짧고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말끝에 "라~"(Lah~)를 붙이는 말버릇이 있다.[15]

홍콩과 비교해서도 영어가 더 폭넓게 쓰이고 있으며 일반 상점가나 택시기사의 영어 구사 능력도 보통 홍콩보다 더 뛰어나다. 이렇게 유창한 영어구사 가능 인구가 많은 덕분에 영국, 미국과 다른 서방국가에서는 홍콩과 함께 아시아에 진출하기 쉬운 거점도시로서 싱가포르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유럽계가 싱가포르에 많다고 할 수는 없다. 간판, 컴퓨터, 학교, 국가 등의 생활 속에서도 영어가 많이 쓰인다.

교육[편집]

싱가포르의 중학교

2000년부터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이 되었으며, 문맹률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편인 5% 미만이다. 1997년 TIMSS자료에서는 싱가포르가 수학과 과학에서 일본(수학 및 과학 3위), 한국(수학 2위, 과학 4위), 미국(수학 28위, 과학 17위)을 제치고 모두 1위를 차지한 바가 있다(1995, 1999, 2003년에 1위를 차지했다).

사립학교공립학교가 섞여 있으나 싱가포르 교육부에서 표준 과정을 설정하고 있으며, 사립학교의 구분도 분명치 않은 것이 어떤 학교는 정부가 운영하고, 어떤 학교는 정부 보조를 받고, 자율 운영, 독립 혹은 개인재정에 의한 학교 재정 등 다양하다. 또한 수준 높은 다양한 국제학교가 외국인 파견근무자의 가족을 위해 운영되고 있다.

싱가포르는 여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주입식 교육을 선호한다. 또한 학교 생활에서의 스트레스는 한국, 일본, 중화민국 등 동북아시아 국가들보다 훨씬 심한 편이다. 이런 면에서 싱가포르는 심한 수준으로 경쟁 교육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에는 초등졸업시험(PSLE, Primary School Leaving Examination)이라는 시험을 치르고 중등과정 이후에는 진학진로에 따라 시험과정이 각각 다르게 설정된다.

대학과정으로는 싱가포르 국립대학, 난양 이공대학싱가포르 경영대학이 유명하다. 이 외에 기술대학으로 테마섹, 싱가포르, 니안, 난양, 리퍼블릭 폴리테크닉이 있다.

참고로 전통적으로 조건부 졸업제를 적용하고 있어 미관상의 이유로 체중을 감량한 학생에 한해 졸업장을 수여한다.

문화[편집]

에스플레네이드

싱가포르는 원래 살던 말레이 민족 인구와 3대에 걸친 중국인, 이민온 인도인과 아랍인 그리고 현대에 이민오거나 현지파견된 한국인을 포함한 여러 민족과 문화가 다양하게 섞여 만들어 내는 복합적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다. 특히 영국 식민지 문화페라나칸(Peranakan, 해협 중국인 사회)의 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근래에 들어 미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나 싱가포르 사람들이 주로 쓰는 영어는 식민지 문화의 영향을 받은 영국식 영어이다. 여기에 다양한 중국어 방언, 말레이어, 인도어가 뒤섞여서 싱글리쉬라는 일종의 영어 방언을 만들고 쓰게 되었다. 교육제도에서 영어가 주된 언어로 쓰이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문학은 주로 영어로 쓰인다.

식민지시대에 이민자를 분리수용하는 정책 때문에 리틀인디아 및 차이나타운과 같은 민족성이 나타나는 지역이 아직도 존재하며, 결과적으로 이주민들이 자국에서 가져온 건축적 영향력이 잘 보존되어 건축물을 통해 각 민족의 성격을 느낄 수 있다. 중국인 구역에서는 여러 층으로 된 탑들, 용 형상 구조물과 조각품들, 건물 외벽에 붉은색과 황금색을 많이 사용하는 등 중국의 다양한 건축 양식을 만날 수 있다. 중국인 이주자들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불교 사원을 건설하기도 했는데, 쌍림(Siong Lim, 雙林)사원이 그것이다.[16] 이주민들이 가져온 다양한 종교의 사원이 시내에 건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관용을 지닌 국가의 본보기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나, 수구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공연 예술[편집]

1990년 이래로 싱가포르 정부는 싱가포르를 동과 서를 아우를 수 있는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진정한 코스모폴리턴의 관문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노력 중 하나는 2002년 10월 12일 문을 연 에스플라네이드 극장이다.

연극, 무용, 음악 그리고 비주얼 아트등으로 구성된 예술축제는 국립예술위원회가 매년 개최한다.

2006년에 처음 개최된 싱가포르 비엔날레는 전 세계의 현대예술을 주제로 하였고, 2008년에는 동남아시아 작품을 소재로 하였다.

내부적으로는 기존 싱가포르인과 이민자 사이에 잘 보이지 않는 긴장과 반목이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또한 정부의 강력한 정책으로 억제되고 있다. 실제로 미래에 17~19세기의 미국 사회와 같은 새로운 이민문화가 생길 수 있을지는 두고봐야 할 과제이다.

종교와 휴일[편집]

(중복)
종교 구성 (싱가포르) - 합이 100%가 넘습니다. 입력한 분은 확인 후 수정 요청.
불교
  
33%
도교
  
18%
무종교
  
17%
기독교
  
18%
이슬람교
  
14%
그 외 종교
  
11%
힌두교
  
5%
전통종교 및 기타
  
1%

국교는 없으며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대교 등 다양한 종교를 믿는 인종들이 같이 살고 있다.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제한도 있는데,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 활동을 1972년부터 금지하는 등이 있다. 강력한 정부 권력에 의해 다른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정치적 종교 관여나 종교 분쟁은 찾아볼 수 없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불교 33%, 기독교18%, 이슬람교 14%, 힌두교 5%, 전통종교 1%, 그 외 종교가 11%이고 무종교가 17%를 보이고 있다. 국가 공휴일을 보면 하리라야하지, 석탄일, 디파발리(힌두교 음력설), 하리라야푸아사(라마단), 크리스마스 등 다양한 종교의 휴일이 국가 공휴일(Bank Holiday)로 지정되어 있다.

이렇게 다양한 싱가포르의 종교는 일상생활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무슬림을 위해 하람(Haram, 금기)인 돼지비계기름(Lard)의 사용 유무를 표시한 레스토랑을 쉽게 볼 수 있으며, 또한 할랄카슈루트를 준수하는 음식점과 채식주의자를 위한 음식점 그리고 일반 음식점들이 나란히 모여 함께 영업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중요한 절기는 다음과 같다.

날짜(매해 다를 수 있음) 이름(중국어) 유래
1월 1일 New Year(元旦·원단) 새해
2월 14일 Chinese New Year(春節·춘절, 華人新年·화인신년) 설날
4월 2일 Good Friday(耶穌受難日,예수 수난일) 성금요일
4월 4일 Easter(復活節,부활절) 부활절
5월 1일 Labour Day(勞動節) 노동절
5월 28일 Vesak Day(衛塞節) 석가탄신일
7월 3일 Youth Day(靑年節) 청년절
8월 9일 National Day(新加坡國慶日, 國慶日·국경일) 독립기념일
9월 10일 Hari Raya Puasa(開齋節·개재절) 라마단
10월 7일 Children's Day(兒童節·아동절) 어린이날
11월 15일 Diwali/Deepavali(屠妖節·도요절) 인도 연등행사
11월 17일 Hari Raya Haji(哈芝節) 합지절
12월 25일 Christmas Day(聖誕節·성탄절) 크리스마스

음식[편집]

싱가포르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 호크센터와 코피 티암

싱가포르는 여러 민족이 같이 사는 나라인 만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인도 등의 영향을 받아 섞인 독특한 음식 문화를 가지고 있다.

  • 칠리 크랩: 매운 토마토 소스의 게 요리.
  • 블랙페퍼 크랩: 칠리 크랩과 함께 유명한 후추 소스로 만든 게 요리.
  • 블랙소스 프론: 검은 두반장 소스의 대하 요리.
  • 삼발 머슬: 삼발소스를 얹어 쪄낸 홍합 요리.
  • 튀긴 오징어: 바삭하게 튀긴 작은 오징어 요리. 주로 맥주 안주로 즐겨 먹는다.

같이 보기[편집]

1992년에 껌 씹는 것이 법으로 중지되었다. 다만,2004년 부터는 허가된 의사, 약사로부터 구매한 니코틴 껌, 치과치료용 껌 등은 예외적으로 인정된다.

각주[편집]

]
내용
  1. 한자표기로 파라주(婆羅洲), 즉 반도의 끝에 있는 섬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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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ungariket Sver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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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뢰벤
역사
건국 칼마르 동맹으로부터
 • 독립 1523년 6월 6일
지리
면적 449,964km2 (55 위)
내수면 비율 8.67%
시간대 CET (UTC+1)
DST CEST (UTC+2)
인구
2015년 어림 9,753,627명 (90위)
인구 밀도 20명/km2 (156위)
경제
GDP(PPP) 2012년 어림값
 • 전체 $3,994억 (34위)
 • 일인당 $41,191 (15위)
HDI 0.916 (7위, 2012년 조사)
통화 크로나 (SEK)
기타
ISO 3166-1 752, SE, SWE
도메인 .se
국제 전화 +46

1 스웨덴의 경우는 왕실 표어가 존재한다. 국왕이 바뀌면 표어도 함께 바뀌는데 현재 사용되고 있는 표어는 칼 16세 구스타브의 표어이다.
2 스웨덴의 왕실 국가는 《왕의 노래》(Kungssången)이다.

스웨덴 왕국(스웨덴어: Konungariket Sverige 코눙아리케트 스베리예[*] 듣기 ), 약칭 스웨덴(스웨덴어: Sverige 스베리예[*], 문화어: 스웨리예)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반부를 차지하는 입헌 군주국이며 수도스톡홀름이다.

역사[편집]

선사시대[편집]

스웨덴의 선사 시대는 후기 구석기인 기원전 12,000년경 남부 지방의 브로메 문화(Bromme Culture)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석기 기술을 사용하였으며 나무 열매를 채집하고 순록이나 물고기를 사냥하였다.

기원전 4천 년경의 푼넬 비커 문화(Funnel-beaker Culture)에서는 농사와 가축 길들이기가 시작되었고 다듬어진 돌도끼와 장식된 토기가 부장품으로 발굴된다.

청동기는 기원전 1,700년경에 시작되는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구리가 나지 않으므로 이 시기의 금속은 수입 후 가공된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단층의 긴 목조건물과 농장을 갖추었다.

고대[편집]

스베아족(고대 스웨덴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서기 98년타키투스게르마니아에 등장한다. 바이킹 시대의 스웨덴인들은 비잔티움 제국이슬람 세계로 연결되는 교역로를 장악하고 이 길을 통해 대대적인 해상 원정을 벌였다. 스웨덴인들은 유럽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으나 11세기에 올로프 솃코눙이 스웨덴 왕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중세[편집]

당시 스웨덴은 제후 연합체였고 군주제도는 라이벌 관계에 있는 왕조들, 더 나아가서는 왕과 봉건제후들의 대립 관계로 주기적인 불안 요소를 안고 있었다. 1397년 포메라니아의 에리크(에리크 13세)가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의 왕이 되어 1439년까지 스웨덴을 통치하였다. 그의 퇴위 후 80여 년에 걸쳐 스웨덴의 섭정들과 덴마크의 왕들은 3왕국의 주도권을 놓고 라이벌이 되었다.

근대[편집]

1523년 스웨덴은 덴마크와의 스웨덴 해방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칼마르 동맹에서 독립했다. 이를 계기로 칼마르 동맹은 해체되었다.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한 구스타브 1세 바사(재위 1523-1560)는 1718년까지 계속된 바사 왕조의 계보를 확립하고 루터교로 이행하는 종교개혁을 강행하였다. 그의 후계자들 치세에 스웨덴은 루터교, 개혁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사이에서 커다란 난항을 겪었다.

1611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즉위와 함께 스웨덴은 루터교로 복귀하였다. 구스타브 2세는 발트 해를 스웨덴의 바다로 만드는 한편 독일 개신교 측의 후견인으로 30년 전쟁(1618-1648)에 참전하였으나 전신 각부에 집중 사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초강대국 스웨덴(스웨덴 제국 혹은 발트 제국)은 약 1세기 가량 계속되었으나 칼 12세가 강행한 러시아와의 대북방 전쟁(1700-1721)이 실패로 끝나 와해되었다.

현대[편집]

이후 소강 상태를 거쳐 18세기 후반에 구스타브 3세가 국가 중흥에 많은 공헌을 했으나 끝내 암살됨으로써 원점으로 돌아갔다. 스웨덴의 대외 전쟁 참가는 나폴레옹 전쟁이 마지막이었는데, 빈 회의 결과 핀란드를 상실하고 노르웨이를 얻었다. 그 후 대규모 군사활동은 거의 대부분 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입헌군주제는 1849년에 실현되었다. 1905년 노르웨이가 독립하여 현재의 영토가 확정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중립을 지켰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때 외교관인 라울 발렌베리헝가리에 있는 유대인에게 비자를 제공, 입국시켰다. 1946년국제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다. 한국 전쟁한국에 야전병원부대를 지원하였다.

1946년 총리가 된 타게 에를란데르는 복지정책을 확대하는 데 큰 힘을 기울였다. 23년 뒤 올로프 팔메가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는 몇 년 뒤 사임하였다. 팔메는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의 월남전쟁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여, 양국 간의 물의를 빚고 말았다. 이후 다시 임명되었지만, 1986년 재직 중 암살되었다.

이후에는 잉바르 칼손이 총리가 되었다.

2014년 10월 4일에는 스테판 뢰벤이 새 총리가 되었다. 이로써 좌파정권이 재출범했다.

지리[편집]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국가이다. 반도의 동부를 차지하며 서쪽에는 노르웨이가 있다. 스웨덴 동쪽에는 핀란드가 있고 남쪽에는 덴마크가 있다.

행정 구역[편집]

스웨덴의 행정 구역은 21개 (län)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지역은 290개 지방 자치체(kommun)로 나뉜다.

기후[편집]

스웨덴은 사계절이 뚜렷하고, 연중 기온이 온화하다.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동일 위도상의 다른 지역보다 따뜻하여 남부와 중부 지방은 여름에 종종 25 ~ 30℃에 이른다. 북부 지방은 북극 기후의 영향으로 6개월간 영하의 온도가 계속된다.

정치[편집]

입헌군주제로 현 국왕1973년 9월 15일에 재위한 칼 16세 구스타프다.

사민주의를 내세우는 사회민주당 계열이 20세기 장기집권한 바 있고, 21세기 들어서도 원내 1당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스웨덴이 북유럽권 복지 국가로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 다만 2006년 우파연립내각이 들어서며 2010년엔 처음으로 우파 재집권에 성공하기도 했으며, 2010년대 들어선 반이민 정서를 내세운 극우 성향의 정당 스웨덴 민주당도 의회에 최초로 진입하는 등 어느정도 변화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14년엔 사민당을 필두로 한 좌파연립내각이 다시 정권을 차지하였다.

주민[편집]

고대 게르만 족의 부족인 스베아족고트족이 융합하여 오늘날의 스웨덴인을 형성하였다.

인구 구성[편집]

2017년 CIA 자료에 의하면 스웨덴의 전체 인구는 약 9,960,487명으로 거의 천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참고로 스웨덴의 인구는 수만명 규모의 북부 원주민 사미인들을 포함한다. 핀란드와의 국경에 주로 사는 5만여명의 핀란드계 스웨덴인들도 있지만 원주민 소수 민족이나, 20세기 이후에 스웨덴에 이민 온 핀란드인 1, 2세대가 45만명 정도로 이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스웨덴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민을 내보내는 나라였다가 제2차 세계 대전 후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로 바뀌었다. 2004년 통계에 의하면 전체 인구의 13.3%가 외국 태생이고 약 5분의 1이 이민자거나 그 자녀들일 만큼 이민자 출신이 많다. 이민자들의 출신지는 핀란드, 구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터키, 이란, 칠레, 그리고 기타 북유럽 국가 순이다. 스웨덴은 내전에 놓여있던 나라들로부터 피난민들을 많이 받아들였다.

이들은 스웨덴 사회에도 많이 진출했다. 예를 들어 1986년에 암살된 전 총리 올로프 팔메는 네덜란드의 후손이다. 그러나 2010년대 시리아 내전 등으로 유럽에 난민이 폭발적으로 유입되며 테러 및 범죄가 증가하는 것 아니냔 우려도 일각에서 제기되자, 스웨덴도 상기한 스웨덴 민주당 같은 극우 성향의 정당들이 2010년대 들어 일정 세를 얻고 있다.

언어[편집]

스웨덴은 스웨덴어(svenska)를 공용어로 지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스웨덴어는 같은 북게르만어군노르웨이어덴마크어와 비슷하고 특히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노르웨이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서로 상당한 정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노르웨이어와 유사하다. 반면, 말이 아니라 글은 노르웨이어(보크몰)가 아닌 덴마크어와 비슷하다. 스웨덴 남부의 일부 지역은 덴마크어에 가까우며, 남북에 걸쳐 기다란 국토로 말미암아 지역에 따른 사투리의 차이가 꽤 있다. 북부의 사미인들이 쓰는 말은 1960년대까지도 억눌렸다. (이 점은 다른 스칸디나비아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이유로 이웃 핀란드의 주민 약 7%가 스웨덴어를 쓰며, 스웨덴어핀란드어와 더불어 공용어로 정해져 있다.

1999년부터 스웨덴은 공식적으로 5개의 소수 언어를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사미어, 메앤키엘리어(Meänkieli, 토르네달렌 핀란드어), 표준 핀란드어, 로마니어, 이디시어이다. 추가로 아랍어를 스웨덴의 공식언어로 인정할 지에 관해서는 아직 검토 중에 있다.

샤미어는 스웨덴에서 7천명 정도가 사용하며 아리에플로그(Arjeplog), 옐리바레(Gällivare), 요크모크(Jokkmokk), 키루나(Kiruna) 시와 그 주변의 정부기관, 법정, 유치원, 양로원에서 쓸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핀란드어와 메앤키엘리어는 옐리바레, 하파란다(Haparanda), 키루나, 파얄라(Pajala), 외베르토르네오(Övertorneå) 시와 그 주변에서 쓸 수 있다.

영어의 경우,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집중적인 교육을 통해 사실상 제2언어에 가까운 구사 능력을 보여준다.

종교[편집]

11세기 이전에 스웨덴인들은, 노르드교라는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가 있었다. 웁살라에는 웁살라 사원이 중심지였다. 11세기부터 스웨덴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그리스도교로 바꿨다.

한때는 다른 북유럽 국가들처럼 종교개혁 이래 루터교의 전통이 강했던 나라였다. 스웨덴어가 노르웨이어와 달리 일찍 표준 정서법이 잡혔던 것도 다름 아닌 이 시기의 성경 번역 과정을 통해 그렇게 됐다.

이후로 20세기 전반까지 루터교 신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했으나, 1960년대 이후 급격하게 세속화되어갔고 현대에는 무신론 및 무종교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로 변했다. 또한 자발적인 헌금이 아닌 자산격차 문단에 상기된 교회세 강요 문제도 젊은 층이 이탈하는 데 한몫 했고, 결국 스웨덴 루터교는 2000년에 국교회 지위를 포기해야만 했다.

2010년 유로바로미터 설문조사에 따르면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18%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전년도인 2009년에 실시된 갤럽 조사에서는 17%만이 교회가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응답했다.

이밖의 기독교 교파에는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침례교가 있다. 사미인들의 일부는 애니미즘 신앙을 따른다. 이민 등을 통해 퍼진 이슬람교 교인들도 일부 있다. 스웨덴 인구의 약 2%가 개신교 예배에 참석한다.

교육[편집]

이 나라는 세계적으로 높은 교육열을 자랑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턴 어릴 때부터 영어 교육을 받아 대부분의 국민이 영어로 큰 무리없는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스웨덴의 교육은 크게 4단계로 이루어져있다. 첫 번째는 유치원 과정이다. 이 과정은 의무적 과정은 아니고, 1세부터 6세까지를 위한 과정이다. 두 번째는 의무교육 과정이다. 모든 사람이 경제적, 사회적 격차에 관계없이 교육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가져야 한다는 사회민주주의 전통에 근거하여 모든 공교육 시스템은 무료로 제공된다. 7세에서 16세까지는 법에 의해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통합한 종합학교가 의무교육기관 역할을 맡는다. 세 번째 단계는 고등학교이다. 고등학교는 의무는 아니지만 무료이다. 네 번째 단계는 대학교 과정이다. 스웨덴에는 총 61개의 대학교 교육기관이 있다. 대학교 교육도 무상으로 제공되며, 유학생2011년 봄학기까지는 무상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 현재는 비EU권 유학생들은 연간 1200만원 정도의 학비를 부담해야 한다. 대학은 3년 과정, 석사는 2년 과정이 대부분이다. 박사의 경우 직업 개념이라서 소정의 월급이 나오는 대신 강의를 해야한다. 하지만 학력에 따른 차별이 없기 때문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도 좋은 일자리를 가지는 일이 많다고 한다.

군대[편집]

스웨덴 국방군(Försvarsmakten)은 스웨덴의 군대이다. 2010년 7월부로 징병제를 폐지하였다.[1]

스웨덴은 지리적으로 유럽의 북부 변경에 위치하여 외적의 침입과 지배로부터 자국을 방어할 수 있는 지정학적 이점이 있었다. 스웨덴은 수백년간 자국의 영토가 전쟁에 개입된 적 없는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안정적인 나라였으며, 무장 중립 노선을 유지해 유럽에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덕분에 2차세계대전 기간에도 스웨덴 경제는 성장할 수 있었고 이는 복지강국 스웨덴도 가능하게 하였다. 즉, 정부는 외부의 적에 대한 침략보다 국민을 더 신경쓸 수 있었다.[2]

한편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커지면서 안보 상황이 불안해지고 있는 데다가 지원병제로는 충분하고 우수한 병력자원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징병제를 부활했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징병한다.[3]

경제[편집]

스웨덴은 세계적으로 국가 경쟁력이 높은 나라이다. 대표적인 경제강소중국 중 하나로 2017년 기준 스웨덴의 1인당 GDP는 $53,248이다. 널리 알려진 스웨덴의 대표 기업으로는 볼보, 에릭슨, 일렉트로룩스, 이케아, H&M 등이 있다. GDP 대비 R&D 지출도 높은 편이다. 유럽 연합에 가입한 국가이긴 하지만 유로화를 쓰지 않고 자체 화폐인 크로나(Krona, 왕관을 뜻하는 crown에서 유래)를 쓴다. 화폐 단위 표기는 ':-'를 사용하며 통화 기호는 SEK이다.

스웨덴은 북유럽 제1의 광공업국이다. 철광석의 생산이 세계 10위 안에 들며, 큰 수출품이 되고 있다. 대신 석탄이 별로 생산되지 않아 많이 수입하는 형편이다. 자동차, 기계, 철강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이 제품의 수출량이 큰 편이다.

무역 상대국은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영국, 미국 등이다.

복지[편집]

스웨덴은 경제/사회학적으로 semi-socialist state(半 사회주의형 국가)로 분류되는 나라며 가장 전폭적인 복지 정책을 추진하는 나라로 꼽힌다. 이 나라의 복지 모델이 확립된 것은 1950년대 스웨덴이 유럽 1위의 경제 부국으로 등극한 후 제도적 측면에서 사회주의 모델을 차용한 것에서 시작한다. 스웨덴은 높은 복지와 함께 높은 세금 부담률이 특징이며 학교, 보육, 건강, 연금, 노인 복지, 사회복지 사업 등을 국가가 거의 무상 제공하고 있다. 다만 2000년대 중반 우파연립내각이 들어서며 스웨덴 복지 제도가 상당히 축소되기도 했지만, 사회적 합의이기 때문에 복지국가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좌파연립내각이 다시 들어섰다.

다음은 사회민주주의 연대 문서자료실의 스웨덴 복지 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

의료[편집]

스웨덴의 의료는 의료비를 본인과 나라가 같이 부담하고 있다. 스웨덴은 1년에 진료비가 900크로나(15만원)를 넘으면 바로 ‘무료 진료카드’가 나온다. 이 때부터 병원 치료비는 모두 공짜다. 약값도 1800크로나(32만원) 이상은 내지 않는다. 환자가 부담하는 상한금액은 국회에서 결정하는데, 1998년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제도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상관없이 국민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다만 입원비는 하루에 80크로나를 별도로 낸다. 입원했을 때 먹는 세 끼 식사와 간식 값이다. 이러한 복지를 유지하기 위해 월급의 50%를 세금으로 내지만 복지를 제공받기 때문에 국민들의 조세 불만이 없다. 또한 노동자가 병이 나면 법으로 병가를 주도록 되어 있어서, 병이 났다고 해서 해고되는 부당해고[4]가 없으며 생활에서 어려움이 없도록 월급의 80%를 사회보험청에서 준다.[5]

노동정책[편집]

  • 연대임금제: 노동조합과 자본가의 중앙협의로 산별 임금차별을 줄이고 있다. 또한 최저임금도 노사가 같이 정하는데, 평균임금의 62%이다. 즉, 스웨덴은 노동조합과 자본가가 같이 회사를 꾸리는 공동경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대임금제는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적용함으로써 직장에서의 차별을 개선하는 정책이며, 연대임금제를 참여할 수 없는 영세사업장들은 자연스럽게 퇴출되도록 하여 일자리의 질을 개선하는 효과까지 있다. 영세사업장의 퇴출, 사양사업의 발생 등으로 생기는 실직자들은 비용부담이 없는 직업교육 및 스웨덴 노총이 구직자의 적성과 흥미에 맞는 직업을 소개하기 등으로써 돕는 적극적 노동정책으로써 구직자의 흥미에 맞는 직업으로의 이동이 되도록 한다. "세계 최고의 선진국인 스웨덴은 자사율이 제일이다."라는 일부의 잘못된 생각[6]과 달리 실제로 스웨덴의 자사율은 다른 유럽 나라들에 비해 10%에 그친다.[7]
  • 비정규직 정책: 비정규직의 비율과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임금차별이 낮다. 스웨덴의 비정규직은 15%이며, 정규직의 80%를 받는다.
  • 창업지원: 노동자자영업자로 전환할 경우에 사업계획서를 내야 하며, 창업전문가들이 자영업을 해도 되는지 결정한다.
  • 퇴직자: 스웨덴에서는 퇴직자에 대해 벌이가 없어 생활에서 어려움이 없도록 1년동안 월급을 주고 있으며, 6개월치 월급을 한 번에 준다. 퇴직자들의 전직을 돕는 민간회사인 ‘노동자안정위원회’에서 보충실업급여(처음에 월급의 80%, 그 다음에는 70%)를 지불하며, 창업에 필요한 절차와 법률, 세무 등 실무지식도 가르친다. 대신 퇴직자는 노동자안정위원회에 월급의 0.3%를 지불한다.
  • 실업보험: 스웨덴의 실업보험제도는 스웨덴 노총을 상위단체로 한 산별노조가 만든 실업기금을 통해 운영된다. 노동자는 취직과 함께 실업기금에 가입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노조원이 된다. 노조 조직률이 80%를 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씨는 직장에 다닐 때 한 달에 실업보험료로 100크로나, 노조회비로 200~300크로나를 냈다. 스웨덴 실업보험기금연합 멜케르 외데브링크 이사는 “재원은 고용주가 55%, 노동자가 45%를 부담한다.”고 말했다.[8]

문화[편집]

스웨덴 요리[편집]

스웨덴 요리는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덴마크, 노르웨이)처럼 전통적으로 조리법이 단순한 편이다. 특히 생선 중 청어와 고기, 감자가 주요 식품 재료이며, 향신료의 사용은 적다. 유명한 요리로는 전통적으로 그레이비와 삶은 감자, 월귤잼을 곁들인 스웨덴식 미트볼, 즉 쇼트불레와, 팬케이크, 루테피스크와 스웨덴식 부페인 스뫼르고스보르드(스웨덴어: smörgåsbord)가 있다. 아크바비트(스웨덴어: akvavit)는 인기있는 증류된 술이며, 스납스(스웨덴어: snaps)를 마시는 것은 문화적 중요도를 가진다. 납작하고 건조하며 바삭바삭한 전통적인 빵인 크네케브뢰드(스웨덴어: knäckebröd)는 근래에 들어 여러가지의 형태를 지니며 발전해왔다. 지역적으로 중요한 음식은 북스웨덴에는 발효한 청어인 수르스트뢰밍(스웨덴어: surströmming)이 있으며,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에는 장어가 있다. 스웨덴은 전통적으로 외국의 영향에 개방적이며 스웨덴인들이 수용하여 즐겨 먹는 음식으로는 18세기에 수입된 프랑스 요리에서부터, 비교적 근래 수입된 스시케밥 등이 있다.

스포츠[편집]

북쪽 지대에 위치한 특성상 스키겨울 스포츠가 발달해있다. 그 외 상당수는 축구도 즐겨한다. 또한 세계적인 축구 선수들이 나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헨릭 라르손, 프레드릭 융베리, 요한 엘만데르 등이 있다.

음악[편집]

인구 대비 글로벌한 인지도를 가진 가수들을 제법 배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혼성 그룹 ABBA(아바)가 20세기 글로벌한 인기를 얻은 바 있으며, 아카펠라로 유명한 리얼 그룹(The Real Group)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헤비 메탈의 성지라고도 불리기도 하며 여러 유명 메탈 밴드들이 스웨덴 출신이다. 대표적으로 아치 에너미, 오페스, 아몬 아마스, 메슈가 등이 있으며 유명 헤비 메탈 뮤지션으로는 네오클래시컬 기타리스트 잉베이 말름스틴 등이 있다.

무용[편집]

스웨덴과 덴마크, 핀란드 등 여러 북유럽 국가에서는, 과거에 폴란드에서 들어온 폴스카를 춘다.[9] 이 밖에 스웨덴의 제례·사교 댄스인 레크스트와 4분의 4박자로 짝이 되어 추는 렌닝엔 등이 있다.[9]

대외 관계[편집]

대한민국 대한민국

양국은 1959년에 수교하였다. 참고로 이때 스웨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도 수교하였다. 그리고 스웨덴은 한국전쟁 때에는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야전병원선을 파견한 바 있다. 한국은 스톡홀름(주 라트비아 대사관 겸임)에, 스웨덴은 서울에 각각 대사관을 두고 있다. 총 2,050명(재외국민 922명, 시민권자 1,128명) 정도의 한국인들이 스웨덴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10] 1988년 하계 올림픽 때 스웨덴은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1950년 5월 9일, 스웨덴은 서방 국가로서는 최초로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일본 일본

스웨덴은 일본과 교류 관계가 그리 많진 않지만, 냉전 시대 이후부터 같은 친서방 국가로서 협력하였다. 1964년 하계 올림픽, 2002년 FIFA 월드컵 때 대표팀을 파견하였다.

미국 미국

스웨덴은 친서방적인 노선으로 미국과 부드러운 외교 관계이며, 오늘날에도 스웨덴은 미국과 친선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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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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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더블린 북위 53° 20′ 52″ 서경 6° 15′ 35″ / 북위 53.347778° 서경 6.259722° / 53.347778; -6.259722
정치
공용어 아일랜드어, 영어
정치체제 공화제, 민주제, 입헌제, 단일제
양원제, 내각책임제
대통령 미할 다니엘 오 히긴
총리 레오 바라드카르
역사
독립 영국으로부터 독립
 • 독립 선언 1919년 1월 21일
 • 승인 1921년 12월 6일¹
지리
면적 70,273km2 (117 위)
내수면 비율 2.0%
시간대 GMT (UTC+0)
DST UTC+1
인구
2015년 어림 4,609,600명 (122위)
인구 밀도 57명/km2 (143위)
경제
GDP(PPP) 2012년 어림값
 • 전체 $1,910억 (55위)
 • 일인당 $41,680 (16위)
HDI 0.916 (7위, 2012년 조사)
통화 유로(€)² (EUR)
기타
ISO 3166-1 372, IE, IRL
도메인 .ie
국제 전화 +353

¹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했다. 1937년부터 지금의 공화정을 실시하고 있다.
² 1999년까지는 아일랜드 파운드

아일랜드(아일랜드어: Éire 에이레[1], 영어: Ireland[2])는 유럽의 북서쪽 브리튼 제도에 있는 섬나라아일랜드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일랜드라는 말은 지리적인 의미(아일랜드 섬)와 혼동될 수가 있어, 아일랜드 공화국(아일랜드어: Poblacht na hÉireann 포블라흐트 너 헤런, 영어: Republic of Ireland 리퍼블릭 오브 아일랜드[*])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일랜드 섬 내에서 북동쪽으로 영국(북아일랜드)과 국경을 마주하며, 동쪽은 아일랜드 해, 서쪽은 대서양과 접하고 있다. 인구는 약 400만명이며, 유럽 연합(EU),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그리고 국제 연합(UN)의 구성원이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2005년 이코노미스트지 조사 결과 삶의 질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2011년 1인당 명목 GDP는 기준 약 47,000달러, 인간 개발 지수 세계 7위의 선진국이다. 다만 실제 임금은 높지 않으며, 대졸자 초봉은 2010년 현재 약 24,000 유로로, 서유럽에서 제일 낮고 이웃한 영국의 75% 수준이다.

역사[편집]

프랑스 갈루아족기원전 5세기 경에 아일랜드로 건너와 토종 민족 게일족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다음 붉은 머리 켈트족이 건너왔다. 5세기성 파트리치오가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성 파트리치오의 날은 아일랜드 최대의 축일이다.

8세기부터 11세기 초에 걸쳐 바이킹족이 아일랜드를 침공했다. 오랜 기간 바이킹족의 공격에 시달린 후 그들의 세력이 약해질 무렵인 1172년 또다시 헨리 2세의 잉글랜드군이 침공해 왔다. 수도인 더블린이 함락되면서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켈트족은 끈질기게 저항하여 잉글랜드 세력을 서서히 몰아냈다.

1534년, 헨리 8세가 대대적인 아일랜드 침공을 감행했다. 이 침공으로 인해 아일랜드는 1937년 정식 독립될 때까지 약 400년 동안 잉글랜드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다. 헨리 2세의 침공으로부터 보면 아일랜드는 약 800년간을 독립을 위해 싸운, 말 그대로 저항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북아일랜드의 역사는 종교 갈등의 역사이기도 하다. 북아일랜드 종교 갈등은 18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17세기 올리버 크롬웰의 침공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 아일랜드에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현재 북아일랜드얼스터에 이주온 장로교인들은 가톨릭교도들을 밀어내고,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이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일랜드 사람들은 수백년이나 영국에서 온 개신교인들에게 차별과 억압을 받았고, 이들의 불만은 부활절 봉기(1916년), 아일랜드 공화국군 결성 등의 무장 투쟁으로 폭발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가톨릭을 신봉함으로써 아일랜드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 것도 영국 개신교인들의 아일랜드 사람 지배에 기인한다. 하지만 지주계급들은 가톨릭에서 장로교로 교파를 바꿈으로써 그들의 재산을 지키고자 하였다.

1800년대 중반에 대기근이 닥쳐 850여만 명이었던 아일랜드의 인구는 660만 명으로 떨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포함한 해외로 이주했다. 아일랜드의 민요들이 슬픈 이유도 영국의 식민통치와 대기근이라는 비극적인 아일랜드 역사에 기인한 것이다.[3]

1916년 부활절 봉기영국-아일랜드 전쟁을 거쳐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아일랜드의 32개 주 중 남부 26개 주가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했다. 1년 후 아일랜드 내전이 일어났다. 1949년에 아일랜드는 영국 연방에서 탈퇴한 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완전독립하였다.

행정 구역[편집]

그러한 행정 구역 구분은 여전히 아일랜드의 문화나 스포츠 분야 그리고 우편 체계에서 사용되고 있다. 아일랜드 하원(Dáil Éireann) 의원의 선거구는 가능하면 주의 경계를 따라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주가 많은 인구를 지니고 있을 경우에는 복수의 선거구를 보유하고(예를 들면 리머릭 동/서) 인구가 적은 주의 경우에는 가까운 주와 묶어서 하나의 선거구를 만들기도 하지만(예를 들면 슬라이고) 실제로 의미있는 주의 경계를 넘어가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방 정부 단위가 다시 구성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1990년대에 더블린 주가 폐지되면서 그 지역에는 세 개의 새로운 지방 의회가 생겨났으며 1890년대 이래로 티퍼레리 주는 행정적인 면에서 두 개의 구분된 주로 분할되었다. 그 결과 아일랜드에는 현재 29개의 행정 주와 5개의 특별시가 있다. 특별시에는 더블린, 코크, 리머릭, 골웨이, 그리고 워터퍼드가 있다. 특별시는 그들이 속한 저마다의 주에서 나머지 지역과는 행정적으로 분리되어 관리되고 있다. 각자의 주 안에서 자율성을 갖는 수준의 자치 도시(borough)는 다섯 곳이 있는데 클론멜, 드로게다, 킬케니, 슬라이고, 웩스퍼드가 포함된다.

아일랜드 위성 사진
아일랜드 공화국 지도
아일랜드의 행정구역을 번호로 표시했음(녹색).
아일랜드 공화국
  1. 더블린주
    더블린
    던레러라스던주
    핑걸주
    사우스더블린주
  2. 위클로주
  3. 웩스퍼드주
    웩스퍼드 읍 (자치 도시)
  4. 칼로주
  5. 킬데어주
  6. 미스주
  7. 라우스주
    드로게다 읍 (자치 도시)
  8. 모나한 주
  9. 캐번주
  10. 롱퍼드주
  11. 웨스트미스주
  12. 오펄리주
  13. 레이시주
  14. 킬케니주
    킬케니 시 (자치 도시)
  1. 워터퍼드주
    워터퍼드 시
  2. 코크주
    코크 시
  3. 케리주
  4. 리머릭주
    리머릭 시
  5. 티퍼레리주
    노스티퍼레리 주
    사우스티퍼레리 주
    클론멜 읍 (자치 도시)
  6. 클래어주
  7. 골웨이주
    골웨이 시
  8. 메이요주
  9. 로스커먼주
  10. 슬라이고주
    슬라이고 읍 (자치 도시)
  11. 리트림주
  12. 더니골주

정치[편집]

이 나라는 대통령제다.

인구[편집]

2014년 기준으로 총 인구는 4,609,600 명이고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2004년(Eurostat 추정) 1.99명으로 유럽 연합 내에서 가장 높다. 2006년 천 명당 출산율은 66.9명, 천 명당 사망율은77.9명으로, 유럽 내에서는 비교적 높은 인구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또한 최근 중앙유럽 국가의 유럽 연합 가입으로 인해 많은 수의 중앙유럽인들이 아일랜드로 몰려들고 있어서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언어[편집]

공용어아일랜드어영어이다. 영국의 통치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은 영어를 사용한다.

아일랜드 영어는 영국식 영어와는 다른 고유의 표현과 매우 빠른 억양으로 알아듣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종교[편집]

2002년 아일랜드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아일랜드인의 약 88.4%가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이다.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은 국교처럼 취급되고 있고, 지금은 덜하지만 예전에는 가톨릭 이외의 다른 기독교는 이단시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아일랜드 성공회 신자가 많다. 나머지 종교들은 타국에서 아일랜드로 이주한 사람들로 인한 것으로 신자 수는 매우 적다.

종교와 정치[편집]

1937년 제정된 원래 아일랜드 헌법은 국민 대다수가 소속된 교회인 로마 가톨릭교회에 "특별 지위"를 보장하였지만, 다른 기독교 교단과 유대교도 인정하였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지배적이었던 이탈리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처럼, 아일랜드도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합법적인 세속화의 시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1972년에 로마 가톨릭교회를 포함하여 특정 종교 단체를 규정한 헌법 조항은, 국민투표로 제정된 제5차 개정 아일랜드 헌법에서 삭제되었다.

헌법에 남아있는 종교 관련 조항은 44항이다. 그 조항은 이렇게 시작한다.

국가는 시민 예배의 의식에서 나타나는 경의가 신의 온전한 능력 때문임을 인정한다. 그것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며, 종교를 존중하여 예를 갖추는 것이다.

이 조항은 또한 신념과 실행과 단체구성에 관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특정 종교에 대한 지원을 금지하고, 국가가 종교적인 차별을 할 수 없게 하고, 국가에서 종교 재단의 학교이든 비 종교 재단의 학교이든 간에 차별적으로 대우해서는 안 된다고 요청한다.

교육[편집]

이 나라는 세계적인 높은 교육열을 자랑한다. 그리고 문맹률이 낮은 편이다.

아일랜드의 대학들은 미국이나 영국과는 다르게 대학의 서열화가 없다. 아일랜드의 대학들은 모두 평균적이고 균등한 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번영한 대학은 더블린에 위치한 트리니티 칼리지이다.

군사[편집]

이 나라에서는 모병제(지원제)를 실시한다.

문화[편집]

문학[편집]

아일랜드는 조지 버클리, 조너선 스위프트, 제임스 조이스, 조지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윌리엄 예이츠, 사뮈엘 베케트, 브램 스토커, 프랭크 오코너영문학사에 중요한 수많은 작가들을 배출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쇼, 예이츠, 베케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여러 자랑스러운 영문학 작가들을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정부는 전통적인 켈트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게일어로 쓰인 작품의 창작을 장려하고, 모든 공적인 문서 및 안내문을 영어와 병기하고 있다.

음악[편집]

U2의 공연 모습

아일랜드의 전통음악은 켈트 음악으로 알려져 있고, 주변국과 아일랜드의 현대 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일랜드의 포크 음악에 나와 있다. 아일랜드의 전통 악기로는 틴 휘슬, 보란, 일리언 파이프 등이 있다. 아일랜드는 세계적인 뮤지션들을 여럿 배출했는데 더 클랜시 브라더스, 치프턴스, 더 더블리너스, U2, 코어즈, 크랜베리스, 데미안 라이스, 웨스트라이프, 엔야, 클라나드, 켈틱 우먼, 글렌 핸사드 등이 있다. 특히 U2는 수십 년 간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밴드다.

스포츠[편집]

아일랜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아일랜드식 축구갤릭 풋볼럭비 유니언이다. 아일랜드에서 Football은 이 갤릭 풋볼을 가리킨다. 그 밖에 게일 체육협회에서 주관하는 헐링 등 많은 전통 체육 종목이 잘 보존되어 있다. 축구에서도 셰이 기븐, 데미안 더프, 로비 킨 등 여러 유명 선수들이 아일랜드 출신이다.

경제[편집]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경제 성장률이 매우 저조했으나 1997년 전 대통령인 메리 로빈슨은 외자 유치 등의 적극적인 개방 정책을 펼쳐 평균 1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급성장했다. 현재 아일랜드의 1인당 GDP는 자국을 식민통치하였던 영국보다 높으며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 나라이다. 아일랜드는 외국기업의 자국내 유치를 위해 법인세를 감면하는 등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자국기업의 약세로 부작용이 일어나자 2001년 이후부터 자국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물가가 비싼 편이다. (그러나 가까운 영국과 비교했을 경우 약 20% 정도 저렴한 편에 속한다. 또한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등 육류와 유제품들은 저렴한 편. →농업 및 공업 참조)

농업[편집]

아일랜드의 주요 산업은 목축업이다. 국토의 약 75%가 방목지와 목초지이다. 아일랜드에는 가 약 700만마리가 있다. 식품가공업과 목초 관리업은 뒤떨어진 편으로 목축업의 생산성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떨어진다.

농업은 감자, 귀리, 등이 주로 재배되고 있으나 토지가 산성인 관계로 경작지 규모가 그리 크진 않다.

공업[편집]

공업은 양조업과 축산물 가공업이 매우 활발하며 기계금속 공업도 발달되어 있다.

정보통신기술 산업 또한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교통[편집]

아일랜드에는 3개의 주요 국제공항(더블린, 샤넌, 코크)에서 유럽 노선, 대륙간 노선, 에어 택시를 운영하고 있다. 아일랜드 국영 항공사로는 에어링구스가 있지만, 라이언에어항공사가 저렴한 요금으로 가장 큰 항공사이다. 런던더블린을 오가는 노선은 유럽에서 가장 붐비는 노선으로 450만명이 2006년에 이 노선을 이용했다.[4][5] 철도는 아이리쉬 레일 사가 관리하고 있으며, 더블린의 휴스톤 역과 코놀리 역이 철도 교통의 중심이다. 더블린과 벨파스트를 잇는 노선은 엔터프라이즈노던 아일랜드 레일웨이즈가 운영하고 있다. 더블린은 대중교통의 질을 높이기 위해 DART, LUAS, 더블린 버스같이 다양한 교통 체계를 통해 확장하고 있다. 고속도로와 주요 간선도로는 아일랜드 국립도로공사에서 운영하고 있고, 기타 도로망은 지자체에서 운영하고 있다. 여객선 노선으로는 아일랜드와 영국간 노선, 맨 섬간 노선, 프랑스간 노선이 있다.

관광[편집]

EU와 EEA 국가, 북미, 남미의 대부분의 국가, 대한민국, 일본, 이스라엘, 호주, 뉴질랜드 국민들은 아일랜드를 방문할 경우 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도보여행길 윅로 웨이(Wicklow Way·132km)는 더블린 남쪽의 말레이 공원(Marley Park)에서 시작된다.[6]

대외 관계[편집]

역사적인 문제 때문에 영국, 특히 잉글랜드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가 좋지 않다.(한국-일본 관계와 유사하다.)(→ 역사 참조) 그러나 양국은 과거를 청산하고 발전적인 관계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정치·경제·문화적 교류 협력이 증진되고 있다. 아일랜드는 식스 네이션즈 챔피언십에 대표팀을 보내고 있다.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모두 아일랜드와 수교하였다. 대한민국과는 1983년에 공식 수교하였으며 이전에 1967년 아일랜드 정부가 주한 영국 대사관을 통해 재한(在韓) 아일랜드인(人)에 대한 영사 업무를 대행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국제 사회에서는 영국과 보조를 취하여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아일랜드는 선수단을 대한민국으로 직접 파견했으나, 2002년 FIFA 월드컵 때는 E조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대표팀은 일본으로 파견되었고, 스페인과의 16강전 한 경기만 대한민국에서 경기를 가졌다.

출처 및 주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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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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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 북위 56° 동경 10° / 북위 56° 동경 10° / 56; 10

단마르크 왕국
Kongeriget Danmark
Flag of Denmark.svg Royal coat of arms of Denmark.svg
국기 국장
표어 덴마크어: Guds hjælp, Folkets kærlighed, Danmarks styrke
(신의 도움, 국민의 사랑, 덴마크의 힘)
국가 아름다운 나라1
Kingdom of Denmark on the globe (Europe centered).svg
수도 코펜하겐 북위 55° 40′ 34″ 동경 12° 34′ 06″ / 북위 55.676111° 동경 12.568333° / 55.676111; 12.568333
정치
공용어 덴마크어
정치체제 군주제, 입헌제, 민주제, 단일제, 의원내각제
여왕 마르그레테 2세
총리 라르스 뢰케 라스무센
역사
건국 8세기
지리
면적 43,094km2 (134 위)
내수면 비율 1.6%
시간대 CET (UTC+1)
DST CEST (UTC+2)
인구
2015년 어림 5,659,715명 (113위)
인구 밀도 129.16명/km2 (78위)
경제
GDP(PPP) 2006년 어림값
 • 전체 $1,985억 (45위)
 • 일인당 $37,000 (6위)
HDI 0.901 (15위, 2012년 조사)
통화 크로네 (DKK)
기타
ISO 3166-1 208, DK, DNK
도메인 .dk
국제 전화 +45

1왕실이나 군대에서는 Kong Christian을 부른다.

덴마크 왕국(덴마크어: Kongeriget Danmark 콩에리에트 단마르크[*]), 줄여서 덴마크(덴마크어: Danmark 단마르크[*], 문화어: 단마르크)는 북유럽에 있는 입헌 군주국이며, 수도코펜하겐이다.

역사[편집]

선사 시대[편집]

현재의 덴마크 지역에 인류가 최초로 거주한 시기는 약 20만년 전이며, 약 5만년 전경 빙하가 북쪽으로 이동, 광범위한 툰드라 지대가 형성되면서 순록을 사냥하는 유목민들이 정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구·신석기 시대(BC 9500년-BC 1500년), 청동기 시대(BC 1500년-BC 400년) 및 철기 시대(BC 400년 이후)를 거친 후, AD 500년경에 농경을 주로 하는 앵글족유트족이 처음으로 집단 부락을 형성하였다.

고대와 중세[편집]

고대부터 윌란 반도(유틀란트 반도)에는 데인족이 살고 있었다. 카를 대제의 북진정책의 결과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811년 프랑크 왕국과 아이더 강을 국경으로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바이킹의 해상원정은 8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구드프레드 왕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다.

성하면서 스웨덴 남부, 영국 동부, 심지어 지중해 연안까지 진출하는 위세를 떨쳤으며, 0]](카누트 대왕)가 1016년에 잉글란드 왕위에 올랐고 1018년에는 덴마크 왕을 겸하였으며, 1028년에는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되어 '북해 제국(앵글로 스칸디나비아 대제국)'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크누드가 세상을 떠나자 북해 제국은 와해되고, 덴마크는 다시 스칸디나비아의 한 세력으로 전락하였으나, 크누드의 조카 스벤 2세에 의해 로마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신 덴마크 왕국이 건설되었다. 스벤 2세가 죽은 뒤, 1074년부터 1134년까지 스벤 2세의 다섯 아들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고, 그 동안에 한때 앵글로색슨의 세력하에 있던 덴마크 교회는 다시 함부르크의 세력하에 들어갔다가 1104년경 룬드를 대주교구로 한 독자의 국교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134년 이후, 다시 교회와 국가의 분열 및 국내분쟁이 지속되다가, 1157년 발데마르 1세(재위 1157∼1182)가 일어나서 국내를 통일하고 발데마르 왕조를 일으켰다. 발데마르 1세는 군사력을 재편성하여 독일에 대항하고 발트해의 슬라브 세력과 싸웠는데, 그 때 슬라브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셸란섬에 구축한 성채가 오늘날의 코펜하겐의 기원이 되었다.

발데마르 2세 때 정치적·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으나, 그가 죽자 다시 왕·교회·귀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서 왕권이 약화되고, 또 같은 시대에 발트해의 지배 및 슐레스비히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스웨덴·노르웨이·한자동맹 세력과의 항쟁이 지속되어 왕국의 약체화를 가져왔다.

발데마르 4세가 죽은 뒤, 발데마르의 딸 마르그레테 1세와 그녀의 남편, 즉 노르웨이의 왕이자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인 노르웨이의 호콘 6세의 아들인 올라프 2세(재위 1375∼87)가 왕위에 오르자 마르그레테가 섭정이 되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해오다가 호콘 6세, 올라프 2세의 사후인 1387년 덴마크 및 노르웨이의 군주로 승인받았다.

마르그레테는 다시 1389년 스웨덴왕을 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동군연합 형태의 3왕국의 통합은 1397년의 이른바 칼마르 동맹에 의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1448년 덴마크의 왕조는 올덴부르크가로 바뀌었으나 칼마르 동맹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근대[편집]

1520년 크리스티안 2세가 독립을 요구하던 스웨덴과 전쟁을 벌여 스웨덴의 스텐 스투레 덴 윙레(Sten Sture den yngre, 연소자 스텐 스투레) 일파를 격파하고 스톡홀름에 입성하여 분리주의자들을 제거한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을 일으켰다. 그러나 스웨덴은 다시 봉기하여 스웨덴 해방 전쟁을 통해 독립을 이룩하여, 결국 1523년 칼마르 동맹은 해체되었다. 덴마크의 종교 개혁은 크리스티안 3세에 의해 추진되어 루터교가 받아들여졌으며, 한편 그 무렵에 노르웨이는 자치 운동이 완전히 봉쇄당한 채 사실상 덴마크의 속국이 되어버렸다.

크리스티안 3세 때는 원로원 등 귀족 세력의 강화를 바탕으로 해서 경제의 발전 및 학자의 배출 등 국가 번영의 기운을 보였으나, 그 후 프레데리크 2세 때 발트 해의 주도권을 놓고 덴마크·스웨덴·폴란드·뤼베크 사이에 ‘북방 7년 전쟁’이 일어났고, 크리스티안 4세 때는 2차에 걸친 스웨덴과의 싸움으로 국토의 손실과 국력의 쇠퇴를 가져왔다. 1660년 프레데리크 3세는 귀족 세력과 대립하는 도시 부르주아 및 루터교 성직자와 결합하여 왕위의 세습제를 승인받고, 1665년에는 국왕의 절대주권을 승인받아 절대군주제를 확립하였다.

1788년 농노제가 폐지되고, 1797년 자유무역의 원칙에 입각한 관세법이 성립되어 덴마크의 경제가 활력을 얻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고 나폴레옹 편에 서게 된 덴마크는 영국·러시아·스웨덴 등 동맹국과 싸운 끝에, 1814년킬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고 4세기에 걸친 노르웨이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영토는 현재의 덴마크와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그린란드로 국한되었다.

국내적으로는 프레데리크 7세의 절대왕정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1842년에는 입헌적 대의 정치를 주장하는 국민자유당이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1849년 프레데리크 7세는 자유주의자들의 요구에 따라 전제정치를 포기하고, 자유 헌법을 성립시켜서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였다. 1864년 프로이센과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패배하여 홀스텐(홀슈타인)과 슬레스비(슐레스비히)를 상실했으나, 독일 제국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면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1920년 북슐레스비히를 수복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독일 바로 근처였기 때문에 민간인 상선들이 독일 잠수함에 격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어 1944년까지 고초를 겪었다. 덴마크에 사는 사람들 중 유대인들이 독일군에게 끌려갔으나 중앙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비율이 미미하였다. 또한, 전쟁 중에는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독일군들이 빼앗았다. 1945년 5월에 덴마크 전체가 연합군에 의하여 해방되었다. 1944년에는 덴마크의 영토였던 아이슬란드가 독립하게 되었다.

지리[편집]

인공위성에서 본 덴마크.

덴마크는 윌란 반도와 여러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빙하 침식에 의해 산이 별로 없으며, 평야가 많다. 예전에는 황무지가 많았으나 개간되었다.

행정 구역[편집]

덴마크의 행정 구역은 5개 지역(region)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지역은 98개 지방 자치체(kommune)로 나뉜다.

기후[편집]

덴마크의 기후는 북대서양 해류(멕시코만류) 및 대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는 위도에 비해 온난하고, 여름에는 서늘하여 기온의 연교차가 적다. 이렇게 온난한 기후는 북유럽과 중앙유럽의 중간지대로서의 특색이다. 그러나 연중 바람이 많고 겨울에는 기후 변화가 심하다. 편서풍으로 인해 덴마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차를 이용하여 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반면, 유틀란트 반도 서부에는 강한 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새로이 개척한 농지 주변이나 독립가옥 주위에 방풍림(防風林)을 조성한다.

가장 추운 1월의 전국 각지의 평균기온은 -1.5℃이고, 가장 더운 7월의 전국 평균기온은 17℃이다. 5월부터 8월은 낮시간이 거의 18시간 지속된다. 전국 각지의 연강수량은 650mm이며 강수분포는 연간 대체로 균등하나 7∼12월, 특히 8월에 비가 많이 온다. 지역적으로는 서부가 강수량이 많고 동부로 갈수록 적어진다. 강우일수(降水日數)는 연간 약 160일, 강설일수(降雪日數)는 연간 20∼40일 정도이다.

정치[편집]

덴마크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기반한 입헌 군주국이다. 현재의 국가 원수는 여왕 마르그레테 2세가 맡고 있다.

주민[편집]

주민은 게르만계의 덴마크인이 거의 대부분이며 다른 민족은 적게 존재한다. 인구는 약 550만 명으로 한강 이남 서울특별시 인구 (542만 명)보다 약간 많다.

언어[편집]

덴마크어공용어이다. 덴마크인스웨덴인, 그리고 노르웨이인은 서로 자국어로 이야기해도 무리 없이 서로 통한다. 영어독일어, 프랑스어도 외국인들 사이에서 사용된다. 덴마크의 문자 해독률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종교[편집]

루터교국교로 인정받으며 그 외에 감리교, 모라비안, 구세군 등의 다른 개신교 종파들과 동방정교회가 존재한다. 2013년 조사에 따르면 덴마크인의 79.1%가 루터교 종파인 덴마크 교회(Den danske folkekirke)에 소속되어 있다. 로마 가톨릭의 경우는 0.55% 존재한다. 이슬람교, 유대교 등의 다른 종교는 아주 적게 존재하며, 특히 이슬람은 아랍 세계이란에서 온 이민들이 믿는다.

교육[편집]

이 나라는 문맹률이 매우 낮은 나라이며 높은 교육열을 자랑한다. 이 나라의 자치령인 페로 제도그린란드 역시 높은 교육열을 자랑한다.

군대[편집]

이 나라에서는 징병제를 실시한다.

경제[편집]

이 나라의 자치령인 페로 제도그린란드2005년부터 지리는 물론이고 경제·외교적으로도 자치를 얻었다. 덴마크 본토 또한 세계적인 경제 수준을 자랑한다. 협동조합을 이루어 농업을 발달시켰다. 젖소를 많이 사육하는 손꼽히는 낙농 국가이며, 낙농 제품이 큰 수출품 중의 하나이다. 돼지의 사육도 활발하여, 베이컨이 비싼 가격으로 수출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린이들의 장난감 회사 레고의 본사가 있다.

문화[편집]

Lt rubjerg knude.jpg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이 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오랫동안 같은 군주 밑에서 연합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형제의식이 강하다.

대외 관계[편집]

한민국한국 전쟁대한민국에 병원선 MS 유틀란디아호를 보내 의료 지원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병원선의 의료 기자재를 한국에 기증하고 한국에 국립의료원을 설립하여 한국의 의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9년에 한국과 덴마크는 정식으로 수교하였다. 코펜하겐에 대한민국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서울에 주한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2011년 5월 13일 비안보분야 동맹으로는 처음으로 녹색성장 분야 동맹을 체결했다. 또 대한민국 지식경제부와 덴마크 기후에너지부 간의 녹색성장협력 양해각서를 비롯해 정부와 기업간 친환경사업과 녹색기술협력 분야에서 9개의 양해각서도 체결하였다. 모두 293 명(재외국민 214 명, 시민권자 79 명)의 한민족들이 덴마크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1] 또한 2007년 현재 덴마크에는 약 9,000명의 한국 입양인이 있다. 한국 대사관, KOTRA, 한인교회, 한국센터, 한글학교가 있고 정한친선협회, 유틀란트 모임, 코리안 클럽, 한인회가 있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편집]

덴마크는 방기에 명예 영사관{상위 기관은 駐부르키나파소(와가두구 소재) 대사관}을 두고 있고,[2]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駐벨기에 대사관(브뤼셀 소재)이 주덴마크 대사관을 겸임하고 있다.[3]

참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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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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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합중국
United States of America
Flag of the United States.svg Great Seal of the United States (obverse).svg
국기 국장
표어 E pluribus unum (라틴어, 1782년 ~ 현재)
(다수로부터 하나로)
In God we trust (영어, 1956년 ~ 현재)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국가 별이 빛나는 깃발(성조기)
메뉴
0:00
United States on the globe (North America centered).svg
수도 워싱턴 D.C. 북위 38° 53′ 42″ 서경 77° 02′ 12″ / 북위 38.895111° 서경 77.036667° / 38.895111; -77.036667
최대 도시 뉴욕 북위 40° 43′ 00″ 서경 74° 00′ 00″ / 북위 40.716667° 서경 74° / 40.716667; -74
정치
공용어 없음¹
국민어 영어
정치체제 공화제, 민주제, 입헌제, 연방제
대통령중심제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부통령
하원의장
연방 대법원장
마이크 펜스
낸시 펠로시
존 로버츠
역사
독립 영국으로부터 독립
 • 독립선언 1776년 7월 4일
 • 승인 1783년 9월 3일
지리
면적 9,826,675km2 (3 위)
내수면 비율 6.76%
시간대 (UTC−4 ~ −12, +10, +11)
DST (UTC−4 ~ −10)
인구
2016년 어림 322,667,000명 (3위)
인구 밀도 33.7명/km2 (179위)
경제
GDP(PPP) 2015년 어림값
 • 전체 $18조 1247억 (2위)
 • 일인당 $56,421 (5위)
명목 $18조 1247억 (1위)
HDI 0.914 (10위, 2016년 조사)
통화 달러 (USD)
기타
ISO 3166-1 840, US, USA
도메인 .gov .edu .mil .us .um
국제 전화 +1

1. 연방 공용어는 없으나 최소 28개주 이상이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하와이 주의 경우 영어와 하와이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뉴멕시코주는 영어와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루이지애나주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미합중국[1](美合衆國, 영어: United States of America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 약자: US, USA), 약칭 합중국(合衆國, 영어: United States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U.S.) 또는 미국(美國)은 주 50개특별구 1개로 이루어진 연방제 공화국이다. 태평양하와이주를 제외한 모든 주와 수도워싱턴 D.C.북아메리카에 있으며, 북측으로는 캐나다와 남측으로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댄다. 북아메리카 북서측에 있는 알래스카주는 동측으로는 캐나다와 서측으로는 베링 해협을 사이로 러시아와 마주한다. 미합중국은 태평양카리브 해해외 영토를 보유한다.

세계 여러 나라 중에 미국은 총면적 기준으로 세번째고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문화 국가고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이민자가 들어온다.[2] 미국의 경제는 2018년 기준 명목상 국내 총생산이 20조 4128억 달러로, 세계 1위 최대 경제 규모로 현재 2위인 중국이 국내 총생산 14조 925억 달러로 세계 2위 수준이다.[3][4]

아시아 대륙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오늘날 미국 본토에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으나 아메리카의 유럽 식민지화 이후 전쟁과 질병으로 급감하였다. 미국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늘어선 13개 식민지에서 건국되었다. 13개 주 국가는 1775년 5월에 식민 본국인 영국과 전쟁을 벌였고(미국 독립 전쟁), 1776년 7월 4일에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민족 자결의 권리를 바탕으로 한 연맹체 국가의 성립을 선포했다. 이후 1783년까지 전쟁을 벌인 미국은, 파리 조약을 통해 영국의 식민지 중에서 최초로 독립을 쟁취했다.[5] 178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 헌법회의에서 오늘날의 미합중국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이듬해에 비준되어 이 주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둔 단일 공화국이 되었다. 1791년에 비준된 미국 권리장전은 10개의 수정 헌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기본적인 민권과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19세기에 미국은 프랑스, 스페인, 영국, 멕시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고, 텍사스 공화국하와이 공화국을 병합했다. 이 외에도 태평양카리브 해에서 영토를 획득했다. 농업 중심의 미국 남부산업화미국 북부 간에 주의 권리와 노예제 확대 문제를 놓고 갈등하면서 1860년대에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가 승리하면서 영구적인 국가 분열 사태를 막았으며,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이후 1870년대에 미국 경제는 가속화된 산업화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로 발전하였다.[6] 미국-스페인 전쟁제1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은 군사 강대국의 지위를 굳혔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은 최초로 핵무기를 보유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이 되었다. 냉전이 종결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이 나라는 전 세계 군비 지출의 3/5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선도하는 강대국이다.[7] [8]

명칭

1507년, 독일지도학자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세계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 지도에서 서반구에 있는 땅을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도학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명명했다.[9] 과거 영국 식민지 시대에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미합중국의 만장일치 선언"(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고 나와 처음으로 이 나라의 현 명칭이 쓰이는데, 이것은 1776년 7월 4일에 "아메리카 합중국 대표자"들이 채택한 것이었다.[10] 1777년 11월 15일에 제2차 대륙 회의에서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채택하면서 "이 연합의 입구는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오늘날의 국호가 확립되었다. 이 국호의 축약형인 'United States'도 표준 명칭이다. 그 밖에 흔히 쓰이는 명칭으로는 'the U.S.', 'the USA', 'America'가 있다. 일상 회화에서 쓰이는 이름으로는 'the U.S. of A.'와 'the States'도 있다. 미국의 대중적인 명칭인 '컬럼비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유래한 말로, 수도인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 에서도 나오는 이름이다.

영어권에서 미국인을 이를 때 '아메리칸'(American)을 사용한다. 또 미국의 정식 형용사는 'United States of America'이지만, 'America'이나 'U.S.'가 가장 흔히 미국을 일컫는 형용사다.

한편 오늘날 대한민국중화권에서 쓰이는 '미국'(美國)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이 '아메리칸'을 중국어 발음에 가깝게 적은 음역인 '美利堅'에서 왔다. 이 말의 기원은 미국이라는 뜻인 'American'에서 나온다. 당시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은 이것을 '메리칸'으로 들었고, 가까운 중국어 발음인 '메이리지안(美利堅)'이라고 했다. 이를 줄여 '메이궈'(美國)로도 표기하였고, 당시 조선인들이 이를 한국어식 한자음으로 읽어 '美利堅(미리견)', '미국(美國)'으로 읽고 표기했다.[11] 일본에서는 '亞米利加'(아미리가)로 표기했으며, 이를 줄여서 '베이코쿠(米國)'로 표기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도 이 표기를 사용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현재에도 일본식 음역인 '미국(米國)'을 사용한다.[12] 그 밖에도 한국어에서 '며리계'(彌里界)라는 독자적인 음차 표기도 있었다.[11]

역사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의 식민지화

알래스카 원주민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본토의 원주민들은 주로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12,000년 ~ 40,000년 전에 아메리카에 온 것으로 보이는 이들[13] 북아메리카의 동남부와 서남부의 원주민 집단은 진보한 농경과 건축을 통해 국가 수준의 사회를 이룩했고 북미 전지역에 걸쳐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를 형성했으나, 유럽인들에 의해 전파된 천연두 등 수많은 외래 질병과 전쟁 및 노예화와 착취로 인해 수많은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1492년경 8천만 명에 이르렀던 원주민의 인구는 1650년경에는 8백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유럽의 흑사병을 넘어선 인류의 대재앙[14] 이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1620년에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갔다. 그림은 윌리엄 핼샐의 '플리머스 항구의 메이플라워 호', 1882년작.

1492년, 제노바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지 못하자 이사벨 1세의 주도로 카스티야아라곤왕국이 연합하여 성립된 스페인 왕실과 계약을 맺어 카리브 해 제도까지 다다라, 원주민들과 처음으로 조우하였다. 1513년 4월 2일, 스페인정복자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스스로 "라 플로리다"(La Florida)라고 부른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는데, 이때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본토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에 스페인 정착지가 들어서고 연이어 오늘날의 미국 서남부지역인 멕시코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인인 모피 무역상 쿠레르 데 브와들은 오대호 주변 지역에 누벨 프랑스라는 전초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마침내 프랑스멕시코 만에 이르는 북아메리카 내륙 지방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했다. 정착에 성공한 초기 영국인 정착지로는 1607년 제임스타운버지니아 식민지와, 1620년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식민지다. 1619년에 이들 식민지는 이미 버지니아 회의를 구성했는데 이는 메이플라워 협약보다도 앞선 미국 최초의 민주적인 의회였다. 1628년에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회사의 칙허로 말미암아 이주민들이 대거 흘러들어오게 되며, 1629년에 메릴랜드에, 1634년에 뉴 잉글랜드에는 10,000여명의 청교도들이 살게 되었다. 1610년대 말에서 미국 혁명에 이르기까지 약 50,000명의 죄수들이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송되었다.[15] 1614년부터 네덜란드 정착민들이 맨해튼 섬뉴암스테르담허드슨 강 하구를 따라 정착했다. 이주해온 대다수의 인구는 잉글랜드청교도, 프랑스스위스위그노, 아프리카에서 노예로서 이주하거나 중남미 식민지에서 들어온(이미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위해 도입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은 뉴잉글랜드버지니아를 중심으로한 미드 애틀랜틱 지역, 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한 남부 곳곳에 이주하여 미국의 역사가 태동했다.

뉴암스테르담, 후에 뉴욕으로 개명하고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1664년작.

167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 이후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아메리카 영토를 영국에 할양했으며, 뉴네덜란드 주는 뉴욕 주로 개명되었다. 새 이주민 다수는 특히 남부로 몰렸는데, 이들은 계약 노동자들로, 1630년~1680년 사이에 버지니아의 전체 이주민 가운데 약 2/3가 계약 노동자들로 남부 대지주들의 플랜테이션이나 잡일을 위해 고용되었다가 계약 후에 자유 시민이 되었다.[16] 18세기에 들어, 아프리카 노예들이 담보 노동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1729년 북부와 남부의 경제·사회적인 갈등으로 캐롤라이나노스캐롤라이나사우스캐롤라이나로 분리되고, 1732년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지아에 식민지가 설치되면서, 이후 미합중국을 이루게 될 영국의 식민지 13개 식민지가 모두 성립됐다. 이들 각 주는 대부분의 남성 자유민들이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 지방 정부를 두었는데, 옛 영국인의 권리에 헌신하고 공화주의를 고무시킨 지방 자치의 관념이 발전하였다. 모든 주에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합법화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출산율이 높고 사망률이 낮으며, 여성을 포함한 이민자가 끊임없이 유입하여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미국의 평균수명은 영국의 평균수명보다 10세이상 앞서있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에게 캐나다를 빼앗았으나, 이 곳의 프랑스어를 쓰는 주민들은 남쪽 식민지와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제외한 이들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1770년에 260만여 명으로 당시 영국의 1/3 수준이었으며, 아메리카 인구의 1/5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이었다.[17]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에 조세를 납부했으나, 영국 의회에 대표자를 두지 못했다. 1730년대와 1740년대의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 부흥주의 운동으로 종교와 종교 자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또한 이 운동으로 인해 미국 대학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종교의 자유와 과학의 탐구를 위해 적지않은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1636년에 하버드 대학교가, 이후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등 소위 아이비리그로 지칭되는 명문 사립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독립과 영토 확장

독립 선언. 존 트럼벌 그림. 1817-18년작.

1760년대와 1770년대 초 혁명기에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국 사이 대립으로 미국 독립 전쟁(1775년 ~ 1781년)이 일어났다. 1775년 6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 회의에서 대륙군을 창설했고,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 이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쓴 독립 선언서를 채택했다. 이 날이 오늘날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1777년 연합 헌장으로 결속력이 약한 국가연합 정부를 설립해서 1789년까지 존속했다.

프랑스 지원을 받은 아메리카 군대가 영국을 무찔러,(요크타운 전투) 영국은 미합중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이들 주에게 미시시피 강 동쪽의 아메리카 영토에 대한 주권을 승인했다. 독립 당시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었다. 조세권을 가진 강력한 국가를 창설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1787년에 필라델피아 헌법회의를 조직하였다. 1789년에 미국 헌법이 비준되었으며, 1789년에 신생 공화국의 초대 상하원 의회가 출범하고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했고, 1790년에는 수도를 필라델피아로 옮겼다. 연방 정부가 개인의 자유 및 다양한 법적 보호 보장의 제한을 금한 권리 장전이 1791년에 채택되었다. 180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워싱턴 D.C.로 옮겼다.

노예제에 대한 입장은 유동적이었는데, 미국 헌법 1조 9항에서는 아프리카 노예 무역 폐지를 20년간 유보했다. 북부 주에서는 1780년에서 1804년 사이에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남부 주에서는 "특별한 관습"(peculiar institution)을 옹호하며 노예주로 남았다. 1800년경에 시작된 제2차 대각성 운동으로 복음주의노예 제도 폐지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의 연도별 영토 확장.

미국은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며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이 일어났으며 인디언 제거 정책을 펴서 원주민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보내졌다.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여 국토의 면적은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여러 이유로 영국과 벌인 1812년 전쟁은 승패가 분명히 갈리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미국 군대가 플로리다를 수 차례 침입하면서 1819년에 미국은 스페인에게서 플로리다와 여타 멕시코 만 연안 영토를 할양받게 된다.(아담스-오니스 조약) 1845년에 미국은 텍사스 공화국을 병합하였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관념이 대중화 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18] 1846년 영국과 오리건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은 오늘날의 미국 북서부를 통치하게 된다.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1848년에 캘리포니아와 오늘날의 미국 남서부할양받게 되었다. 1848년~49년의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서부 이주가 가속화되었다. 새로이 철도가 부설되면서 정착민들의 이동이 쉬워지고, 원주민과의 갈등도 커졌다. 50년 만에 4천만 마리 이상의 아메리카들소(버팔로)가 가죽과 고기를 얻거나 철도망 확대의 편의를 위해 학살당했다. 평원 인디언들의 자원이던 버팔로를 잃어 원주민 문화는 큰 타격을 입었다.

내전과 산업화

"게티즈버그 전투", 쿠리에 & 이브의 석판화. 1863년경.

노예주와 자유주는 주와 연방 정부간의 관계를 놓고 갈등했으며, 신설 주의 노예제 시행 여부를 놓고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주로 노예제 반대 입장이었던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링컨의 취임에 앞서 일곱 노예주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연방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남부 연합이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미국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노예주 네곳이 남부 연합에 추가로 가입했다. 이에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에서 남부 연합 노예의 자유 선언을 했다. 1865년에 남부 맹방이 패배하여 미국 헌법은 세차례 수정되어 당시 노예 신분이었던 아프리카 노예 4백만여 명이 자유를 보장받았으며,[19] 미국 시민이 되었고,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이 전쟁으로 연방 정부의 권력이 크게 증대되었다.[20]

링컨이 암살당하면서, 새로이 해방된 노예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남부 주를 재건하고 재통합하는 목표로 했던 공화당의 재건 정책이 급진화되었다. 1876년 대선 논쟁이 1877년의 합의로 해결되면서 미국의 재건 정책이 종식되었으며, 이내 짐 크로 법으로 수많은 아프리카계 미국 시민들이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북부에서는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남유럽동유럽에서 전례없이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미국의 산업화가 더욱 진전하였다. 1929년까지 지속된 이민 물결로 노동력이 유입되고 미국 문화가 변화하였다. 국가 기반 시설이 발전하면서 경제는 호황을 이루게되었다. 1867년 러시아에서 알래스카를 매입하면서 미국 본토의 영토 확장이 일단락되었다. 영토를 잃은 원주민이 1890년 운디드 니 학살로 최후의 대규모 무장 투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893년, 태평양 하와이 왕국의 왕정이 미국 거류민들이 주동한 정변으로 전복되자, 1898년에 미국은 이 군도를 병합했다. 같은 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미국은 강대국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으며, 푸에르토리코, , 필리핀을 병합했다.[21] (50여년 뒤에 필리핀은 미국에서 독립했으나, 푸에르토리코와 괌은 미국 영토로 남아있다.)

세계 대전과 대공황

1936년 더스트볼로 버려진 사우스다코타의 농장.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 미국은 중립 태도를 취했다. 미국인 대부분은 영국과 프랑스를 동정했으나, 많은 이들이 참전에 반대했다.[22] 1917년 미국은 결국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은 동맹국에 불리하게 전개된다. 전후 상원은 국제 연맹을 창설한 베르사유 조약에 비준하지 않았다. 미국은 고립주의에 경도된 일방주의 정책을 추구했다.[23] 1920년대에 여권 신장 운동은 여성 투표권을 보장하도록 헌법이 수정되는 성과를 얻었다. 번영을 구가하던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는 대공황의 단초가 된 월 가의 대폭락 즉 검은 목요일로 끝나버렸다. 1932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경제 위기에 맞서 수정자본주의뉴 딜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중부 지역에 극심한 사막화인 더스트 볼(Dust Bowl) 현상으로 수많은 농촌이 빈곤에 빠졌으며 서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미국은 중립을 유지하다, 1939년 9월에 나치 독일폴란드를 침공하면서 1941년 3월 무기대여법을 통해 연합국에 물자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진주만을 급습하면서 미국은 추축국에 대항하여 연합군에 참전했다. 참전으로 미국의 자본 투자와 산업 능력이 높아졌다. 주요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은 전쟁 덕분에 부유해진 나라였다.[24] 연합국의 브레튼 우즈 회의얄타 회담으로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세계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연합국이 승리하자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전후에 발효한 유엔 헌장이 도출되었다.[25] 처음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미국은 그 해 8월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26]

냉전, 저항 정치, 사회 변혁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연설하고 있는 마틴 루터 킹 2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기에 미국과 소련은 각자 북대서양 조약기구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통하여 유럽의 군사 현안을 주도하며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법치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소련은 전체주의공산주의 & 사회주의 &관치경제를 이끌어갔다. 양자는 대리전을 통하여 전쟁을 벌이고 여러 독재 정권을 지원했다. 1950~53년의 한국 전쟁에서 미군은 중국 공산군과 싸웠다. 하원 반미 활동 위원회(HUAC)에서는 좌익 단체의 국가 전복 혐의를 캐내는 조사 활동을 벌였으며, 매카시 상원 의원은 반공 정서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61년 소련이 최초의 유인 우주선을 쏘아올리면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 최초로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내세워 1969년에 기어이 실현했다. 또 케네디는 쿠바에서 소련군과 핵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미국 경제는 계속 발전했다. 마틴 루서 킹 2세비폭력 저항주의와 맬컴 엑스스토클리 카마이클이 주도한 과격주의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흑인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1963년에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을 통과시켜 흑인의 민권이 성장했다. 하지만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여러 인권운동 지도자들이 암살 당하는 등,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후임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동남 아시아로 대리전을 확대했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런 가운데 반문화 운동반전 운동흑인 민족주의, 성 혁명의 영향을 받아 널리 성장했다. 1960년대는 각종 암살사건, 흑인 민족주의, 여성해방운동, 히피 문화, 동성애문화가 등장한 변혁과 격동의 시기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불명예로 1974년에 닉슨은 탄핵되는 것을 피하고자 최초의 사임 대통령이 되었으며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1970년대 말 지미 카터 행정부 시대에는 스태그플레이션이란 인질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1980년에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 정치가 우익화되고 대중들도 1960년대의 히피문화에서 보수주의로 변화하였다. 레이건 2기 정부 때는 이란-콘트라 사건이 일어나고, 소련과 괄목할만한 관계 증진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다.

오늘날

2001년 9월 11일 아침에 일어난 세계 무역 센터 테러.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시기에 미국은 유엔을 주도하여, 걸프 전쟁의 승인을 받아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대에 현대 미국 역사상 최장 기간의 경제 성장(1991년 3월 ~ 2001년 3월)이 이루어졌으나, 닷컴 거품 현상이 생겼다.[27]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1998년에 빌 클린턴이 탄핵받았으나, 끝내 임기를 지켰다. 2000년 대선에서 조지 H. W. 부시의 아들 조지 W. 부시가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2001년 9월 11일, 알 카이다 테러범들이 뉴욕 시의 세계 무역 센터와 미국 국방부 펜타곤테러 공격을 감행하여, 3천 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대테러 전쟁"을 개시했다. 2001년 말,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탈레반 정권과 알 카에다 훈련소를 제거했고 2002년, 이라크에 정권 교체 압박을 가했다.[28] 부시는 2003년에 이라크를 선제 공격했으며, 과거 미국의 동맹자였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발생하여 멕시코 만 연안 지대 상당 지역을 심각하게 파괴했으며, 대도시 뉴올리언스를 황폐화했다. 2008년 11월 4일, 세계적인 경제 침체 속에서 버락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경기 침체는 계속되었으나, 대공황 수준은 아니었고, 2011년 이후 우려와 기대 속 회복 단계에 있다. 2017년에는 도널드 존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지리, 기후, 자연 환경

미국 본토의 위성 지형 사진.

미국 본토의 육지 면적은 약 7억7천만 헥타르다. 본토와 떨어진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주로, 면적이 1억5천만 헥타르다. 북아메리카 대륙 남서쪽으로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자리한 군도인 하와이 주 면적은 1백6십만 헥타르를 겨우 넘는 정도다.[29] 미국은 러시아와 캐나다 (또는 중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3, 4위인데,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미국과 중국의 면적 순위는 중국-인도간의 영토 분쟁 지역 및 미국 총 면적의 계산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의 면적을 놓고 CIA 월드 팩트북에서는 9,826,676 km2,[30] 유엔 통계국에서는 9,629,091 km2,[31] 브리태니커 사전에서는 9,522,055 km2[32] 으로 쓰고 있다. 육지 면적만 따지자면 미국은 러시아, 중국과 캐나다 다음인 4위이고, 오스트레일리아보다 약간 크다.[33]

1782년 이래 미국의 국조인 흰머리수리.

대서양의 해안 평원에서 내륙으로 가면 피드먼트낙엽수 삼림과 구릉 지대로 이어진다. 애팔래치아 산맥은 동부 연안과 오대호, 중서부를 가른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수계미시시피 강-미주리 강은 국토의 심장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평평하고 비옥한 대초원을 이루는 대평원은 남동부의 고원 지역까지 서쪽으로 뻗어있다. 대평원 서쪽 끝에 있는 로키 산맥은 국토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콜로라도에서는 고도가 4,300m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더 서쪽으로 가면 로키 산맥의 대분지(그레이트베이슨)와 모하비 사막 등 사막이 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캐스케이드 산맥태평양 연안과 가까이 뻗어있다. 알래스카에 있는 고도 6,194m의 매킨리 산은 미국과 북아메리카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알래스카의 알렉산더 제도알류샨 제도, 하와이의 화산 등 활화산도 흔하다. 로키 산맥 옐로스톤 국립 공원 밑에 있는 초화산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화산체다.[34]

광대한 영토에 다양한 지리 환경을 지닌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기후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서경 100도선 동쪽으로는 기후대가 북쪽의 습윤 대륙성 기후에서 남쪽의 온대 습윤 기후에 이른다. 플로리다 남쪽 끝 지역은 하와이처럼 열대 기후이다. 서경 100도선 서쪽의 대평원 지역은 반건조 기후다. 서부 산맥 상당 지역은 고산 기후를 나타낸다. 남서부의 사막과 대분지의 기후는 건조하며, 캘리포니아 해안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나고, 오리건워싱턴주 및 알래스카 남부는 서안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알래스카 대부분은 아극 기후나 극기후다. 극단적인 기후 현상도 종종 일어나는데, 멕시코 만과 접한 주에는 허리케인이 곧잘 발생하며, 세계 토네이도의 대부분도 미국 내, 특히 중서부 토네이도 길목(Tornado Alley)에서 주로 일어난다.[35]

미국의 생태는 최다 생물다양성 국가(megadiverse countries)로 여겨진다.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에는 관다발식물 17,000여 종이 있으며, 하와이에서는 속씨식물 1,800 종 이상이 발견되는데, 이들 가운데 본토에서도 서식하는 종은 적은 수에 불과하다.[36] 미국은 포유류 400종, 조류 750종, 파충류 및 양서류 500종 이상이 서식하는 땅이다.[37] 곤충은 91,000종 이상이 서식한다고 한다.[38] 1973년의 멸종 위기종 법안은 위기종과 취약종 및 이들의 서식지를 보호하는데, 미국 어류 및 야생생물 보호국에서 이들 서식지를 감시한다. 미국에는 58개의 국립 공원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연방 차원에서 관리하는 공원, 숲, 야생 지역이 수백곳 있다.[39] 미국 정부는 국토 육지 중 총 28.8%를 소유하고 있다.[40] 이 가운데 대부분의 지역은 보호 구역이며, 일부 지역은 원유 및 가스 시추, 광산 채굴, 벌목, 목축을 위해 임차한 곳도 있으며, 군사 목적으로는 2.4%가 이용되고 있다.[40]

환경문제

1970년대 이후로 환경 문제가 국가 의제에 계속해서 제기되어왔다. 원료와 원자력 에너지에 관한 논쟁, 공기와 수질 오염, 야생동물과 산림 벌채,[41][42] 지구 온난화에 대한 국제적 대응 등 환경갈등이 계속되었다.[43][44] 환경문제는 대부분 연방정부와 국가기관이 참여하고있다. 이렇게 환경문제가 제기되면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점은 1970년대 대통령명으로 만들어진 미국 환경보호국 (ERA)이다.[45] 1964년 정부가 소유하고있는 토지 중 황무지를 사용하는 일환으로 원시지역 보호법을 만들었다.[46] 1973년 절멸 위기종 보호법은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들을 보호하기위해 만들어졌고,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에서 관리한다.

인구 통계

인종과 언어

출신 국가별 인종 분포, 2000년 기준.
인종/민족
(2014년 조사 기준)[47]
인종:
백인 77.4%
아프리카계 미국인 13.2%
아시아계 5.4%
아메리카 원주민, 알래스카 원주민 1.2%
하와이 원주민, 태평양 섬 원주민 0.2%
기타 6.2%
혼혈인 2.5%
민족:[48]
히스패닉/라티노 17.4%
히스패닉/라티노 이외 82.6%

미국은 지구상의 모든 인종과 민족이 뒤섞여있는 세계 최대의 다민족국가다. 2000년 조사된 인구 분포도를 보면 백인이 전체인구의 75.1~81.1%, 흑인이 약 12.3~12.6%, 아시아계 3.7~3.9%, 미국원주민이 0.8%다. 백색인종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중에서도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다.

미국의 발전은 그 역사를 통해서 유럽·아프리카·아시아로부터의 이민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는데, 오늘날 이들 민족은 융합하여 새로운 아메리카 민족을 구성해 가고 있다. 그러나 같은 영어를 사용하고, 같은 미국적인 생활을 영위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외견상 분명히 몇 인종으로 나눌 수 있다. 유럽 백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그중에서도 출신 국가별로는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다. 최초로 이주해 온 것은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이며, 독립할 때까지는 이 밖에 독일인 등이 추가되었지만 중심은 영국인이었으므로 현재도 미국에서는 영어가 일상어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영어 (미국 영어)는 표준 영국 영어와 어휘나 문법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남북전쟁 이후는 종래의 북유럽계의 이민에 비하여 이탈리아인·슬라브인 등의 남유럽계·동유럽계 이주자의 비중이 높아지고, 20세기 초에는 전 이민의 8할을 이들 이민이 차지하였다. 이민을 가장 많이 온 때는 188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이며, 그 전후를 포함하여 1820년부터 1961년까지의 4,200만 명이 입국했다. 또한 19세기 말부터는 중국인·일본인·한국인·필리핀인·멕시코인·쿠바인·푸에르토리코인 등이 증가하고 있어, 이들을 총칭하여 신이민이라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이래 이주하게 된 유대인은 특이한 존재로서, 현재 전 세계 1,500만의 유대인 중 약 550만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들 중에는 자산가나 훌륭한 학자가 많고, 각지에 집단적인 생활을 하며, 미국 사회에서는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가지고 있다.

비(非)백인 가운데 가장 큰 인구를 가진 소수민족은 히스패닉으로, 라틴 아메리카로부터의 이민 유입 및 높은 출산율 등으로 오랫동안 가장 많은 소수 집단이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넘어섰다. 또한 서부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수 히스패닉계 주민은 원래 멕시코 영토였던 그들의 거주지가 미국에 병합됨으로써 자동적으로 미국인이 되기도 했다.

흑인은 전체 인구의 약 12%를 차지한다. 아시아계 이민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나 캘리포니아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에서 아직 주류는 아니다. 한국계 주민들은 약 2백만명, 중국인은 약 3백만명, 일본인은 약 80만명 정도로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한 서부 지역에 많다.

미국 남부에는 흑인이 밀집해있으며, 이 지역의 백인은 주로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다. 동북부 지역의 인종 구성은 매우 다양하다. 중북부 지역은 독일계, 아일랜드계, 동유럽계, 북유럽계 백인이, 남서부는 히스패닉이, 서부는 히스패닉과 아시아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국에는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 출신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공용어는 사실상 영어 (미국 영어)이나, 히스패닉계 인구가 많은 서부 지역에서는 스페인어를, 특정 민족의 인구가 많은 구역은 그 민족의 언어를 공공 표지판 등에 병기하기도 한다.

미국 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 해당하는 영토내에 거주하고 있는 원주민, 그리고 이들의 현대 후손이다. 이 표현은 광범위한 부족, 국가, 민족을 포괄하며 이 중 많은 무리들은 오늘날에 정치적 공동체로 살아남았다.

도시와 지역

타임 스퀘어 (2013), 뉴욕, 언론과 미국 소비자뿐만 아니라 브로드 웨이 극장 등 지구를 나타낸다.

미국은 일찍이 도시화된 국가로, 도시별 특성과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각 지역은 자원, 자본, 노동력 모두 충족되어야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는 처음으로 북동부가 달성했다. 이후 기후와 자연경관이 발전에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해서, 이를 가진 서부가 각종 산업의 꽃을 피웠으며, 최근 남부미국 남서부가 미국 경제를 뒷받침하고있다. 북동부와 버지니아 지역은 초기 미국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현재까지도 각종 산업의 중심지이고, 서부세계대전골드러시 이후 광공업과 군사업을 바탕으로 급격히 발전하다가 영화산업과 첨단산업 그리고 농업이 뒤이어 발전해, 현재 북동부 지역의 경제력과 필적한다. 남부남북전쟁 이전에는 소수 영국계 백인 귀족이 플랜테이션을 바탕으로 목화산업과 담배산업으로 성장했으나, 남북전쟁 이후 쇠퇴하고, 최근 들어 제조업과 각종 서비스업이 발전하고 있다.

20세기까지 세계의 경제, 문화를 주도했던 미국 북동부 지역의 뉴욕보스턴은 미국 내에서도 가장 밀집되고 고층건물이 많은 메갈로폴리스를 구성하며, 근교에는 많은 산업도시와 주거지역이 형성되어있다. 뉴욕은 세계 금융,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일찍이 발전했으며, 보스턴 또한 우수한 교육을 바탕으로 금융업이 매우 발달했다. 내륙으로는 미국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건국 초기 중심지이었던 필라델피아와 철강도시 피츠버그가 위치해있다. 이들 내륙 지역은 러스트 벨트에 속해, 근래 미국 제조업의 쇠락으로 불경기의 진원지에 서있다.

미국의 오락, 관광산업의 중심지인 라스베이거스.

뛰어난 지리적 조건과 기후,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20세기부터 급격히 발전한 캘리포니아주는 최남단에 샌디에이고가,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가 위치해있으며 내륙으로 리버사이드새크라멘토와 같은 대도시가 있다. 이들 도시는 연중 온화하고 건조한 기후를 바탕으로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현재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이민자가 백인과 함께 주류를 이루고있다. 로스앤젤레스는 영화와 연예, 오락산업이 특히 발달해 세계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고 뉴욕에 이어 인구가 가장 많다. 샌디에이고는 군수산업과 해양과학이 특화된 과학도시며, 샌프란시스코는 새너제이(San Jose)와 이어져 실리콘밸리를 이뤄 첨단산업을 이끌고 있는 도시다. 내륙 지역과 분지/계곡 지역은 농업이 발달했는데, 집산지인 베이커즈필드를 중심으로 광대한 과수원과 쌀 농장이 위치해 지역의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 서부 지역은 캘리포니아주 외에도 워싱턴주시애틀, 네바다주라스베이거스, 오리건주포틀랜드, 콜로라도주덴버, 애리조나주피닉스 등이 위치한다. 시애틀은 항공산업과 선박업이, 라스베이거스는 오락과 관광업이, 포틀랜드는 임업이, 덴버는 로키 산맥 지방의 교통과 상업 중심지이자 요양지다.

이들 지역은 선 벨트에 속하며, 인종이 매우 다양하고 그 분포가 고르다. 스페인어를 많이 사용하는 히스패닉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또한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이민자가 가장 많이 진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하와이주의 자연경관

미국 중서부 지역은 오대호를 중심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밀워키, 버펄로 등의 대도시가 위치해있으며, 시카고는 상업과 금융업을 바탕으로 미국 제 2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는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쇠퇴하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하다. 이들 지역의 기후는 대체로 추워 스노벨트에 속하며, 20세기 후반에 들어 침체된 경제를 일컬어 러스트 벨트라고 불린다. 오대호와 미시시피 강을 중심으로한 교통이 매우 발달했고, 중공업과 과학이 매우 발달했다. 서쪽으로는 그레인 벨트라고 불리는 세계 최대의 곡물 지대가 있다.

미국 남동부 지역은 애틀란타, 뉴올리언스, 내슈빌, 샬럿, 버밍햄 등의 대도시가 있으나 도시화와 산업화가 늦은 지역이다. 최근 따뜻한 기후와 낮은 물가를 바탕으로 서남부 지역과 함께 선 벨트를 이루고있어,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이다. 애틀란타는 상공업이, 재즈의 고향인 뉴올리언스는 미국의 대표적 항구도시이며 석유산업이 발달했고, 내슈빌은 음악(종교/컨트리)과 출판업이, 샬럿은 금융업이, 버밍햄은 제철업이 발달했다. 이들 지역은 흑인의 인구비가 높아 블랙 벨트로 불리며, 과거 흥했던 농업이 쇠퇴해 20세기 중반까지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지역이나, 최근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급격히 발전 중이다.

미국 중남부 지역에는 휴스턴, 댈러스, 포트워스, 샌안토니오, 오클라호마시티 등의 대도시가 있는데, 풍부한 자원과 멕시코와의 접근성으로, 최근 급격히 발전하는 지역이다. 휴스턴은 우주산업이, 댈러스는 석유산업과 서비스업이, 샌안토니오는 교육과 군사시설이 많다.

플로리다주는 남부에 속하고 아메리카 연합국에 가맹한 적도 있으나, 문화와 역사는 독립적인데, 히스패닉이 주류이고, 온화하고 강렬한 햇빛을 가져, 오렌지 등의 과수재배가 활발하고, 휴양지가 많다. 마이애미는 중남미와 미국을 잇는 거점도시로, 항구도시이자 관광도시다. 탬파 등의 산업 도시뿐만 아니라 해안가 전부가 관광도시로 이뤄져있다.

하와이주는 섬 지역으로, 독특한 풍토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관광업이 주된 산업으로 하고있다. 군사적 요점이기도 한 하와이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알래스카주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데, 광활한 토지에 다이아몬드와 석유를 포함한 각종 광물자원을 가지고있다. 매우 추운 날씨로 인구는 적으나, 광공업과 관광업을 바탕으로 소득이 높다.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워싱턴 D.C.는 D.C를 중심으로한 정치와 첨단과학의 중심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비교적 소득이 높고, 군사와 행정기능이 발달했고 역사도 오래되었다. 여기에는 워싱턴 D.C.를 포함한 볼티모어 등의 도시가 위치해있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광역시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대도시와 주변 소도시들을 광역권으로 포함시켜 인구를 측정한다. 다음은 인구순으로 나열한 도시 목록이다. [49]

미국 인구순 대도시 (자세히 보기) 보기  토론  편집  역사
순위 중심 도시 광역 도시권 인구 대도시권 지역[50]
뉴욕
뉴욕

로스앤젤레스
로스앤젤레스

밀레니엄 파크에서 보이는 시카오의 스카이라인
시카고
1 뉴욕 20,182,305 뉴욕-뉴저지-코네티컷-펜실베이니아, NY–NJ–CT–PA MSA 북동부
2 로스앤젤레스 13,340,068 로스앤젤레스-롱비치-산타아나, CA MSA 서부
3 시카고 9,551,031 시카고-졸리엣-네이퍼빌, IL–IN–WI MSA 중서부
4 댈러스-포트워스 7,102,796 댈러스-포트워스-알링턴, TX MSA 남부
5 휴스턴 6,656,947 휴스턴-우들랜즈-슈거랜드, MSA 남부
6 워싱턴 D.C. 6,097,684 워싱턴, DC–VA–MD–WV MSA 북동부
7 필라델피아 6,069,875 필라델피아-캠던-윌밍턴, PA–NJ–DE–MD MSA 북동부
8 마이애미 6,012,331 마이애미-포트로더데일-폼파노비치, FL MSA 남부
9 애틀랜타 5,710,795 애틀랜타-샌디스프링스-매리에타, GA MSA 남부
10 보스턴 4,774,321 보스턴-케임브리지-퀸시, MA–NH MSA 북동부
11 샌프란시스코 4,656,132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프리몬트, CA MSA 서부
12 피닉스 4,574,531 피닉스-메사-글랜데일, AZ MSA 서부
13 샌버너디노-리버사이드 4,489,159 샌버너디노-리버사이드-온타리오, CA MSA 서부
14 디트로이트 4,302,043 디트로이트-워런-리보니아, MI MSA 중서부
15 시애틀 3,733,580 시애틀-타코마-벨뷰, WA MSA 서부
16 미니애폴리스-세인트폴 3,524,583 미니애폴리스-세인트폴-블루밍턴, MN–WI MSA 중서부
17 샌디에이고 3,299,521 샌디에이고-칼즈배드-샌마르코스, CA MSA 서부
18 탬파-세인트피터즈버그 2,975,225 탬파-세인트피터즈버그-클리어워터, FL MSA 남부
19 덴버 2,814,330 덴버-오로라-레이크우드, CO MSA 서부
20 세인트루이스 2,811,588 세인트루이스-세인트찰스-파밍턴, MO–IL MSA 중서부
출처: 미국 인구조사국의 2015년 인구 조사[51]

국민성

다양하고 복잡한 국민성을 다음의 항목에 열거하였다.[52]

  • 선택의 자유와 책임감: 사상적 자유와 소비 선택, 진로 선택 등의 자유는 완벽히 보장되며 그에 따른 책임감은 항상 따른다.
  • 독립과 자립: 미국 부모의 자녀 교육의 최고 목표는 독립심을 길러주는 것으로, 어린이는 어릴 때부터 이를 기른다.
  • 가치의 존중과 인간애 정신
  • 민주주의와 타 문화에 대한 개방성
  • 준법정신과 국가협력적 태도 및 애국심: 교통질서뿐만 아니라, 범법적 준법정신이 투철하고, 범죄자에 대한 자비는 없다. 감옥체계가 발달되었다.
  • 가족 중심의 사회 그리고 높은 이혼율과 가족관계의 경제적 선택: 가족이 모든 개인의 중심에 있고 서로 의지하나,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독립되어있고, 이에 따라 이혼이 쉽게 인정된다.
  • 기독교 문화 속 휴일과 감사하는 태도: 추수감사절성탄절은 국가 최대 휴일이고 광범위한 일에 걸쳐 기독교 정신이 자리 잡고있다.
  • 남녀평등과 개방적인 성문화: 남녀의 성적 역할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나, 성적 차이는 차별받지 않으며, 성문화가 개방적이다.
  • 물질적 번영과 미국제일주의: 높은 국민 소득과 생활 수준이 미국 것이 제일이라는 안이한 태도를 만들기도 한다.
  • 소비 생활과 사치성 문화, 대중 문화

미국의 이민 정책

미국은 이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이민 정책은 국가의 기초를 설계하는 가장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다. 초기에 미국은 경제발전을 위한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유색인 이민을 받아들였으나, 이미 일터에 뿌리를 내린 백인 노동자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시대에 따라 유색인 이민문호를 조절했다.

미국은 1850년 무렵부터 아시아계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다가 이들의 영향력이 커질 조짐이 있자, 1882년 중국인 이민부터 금지시키더니 1924년 아시아계 이민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당시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여기에서 예외였다. 캘리포니아주는 이보다 앞선 1913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을 제정해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막았는데, 표적은 아시아계였다. 토지를 소유하면 자본을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법은 미국시민(미국 시민권을 소유한 자)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도록 규정했는데 아시아계 이민 1세는 미국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다 2차 대전에서 중국과 연합국으로 싸우게 되자 중국에 이민문호를 개방한 것이 1943년, 인도가 1946년, 한국일본에 대해서는 1952년에 와서야 이민문호를 다시 열었다. 문호를 개방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민이 허용되는 숫자는 생색내기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1952년 개정법으로 아시아 이민 1세도 미국시민이 될 수 있었다.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말은 투표권이 있다는 말로 크건 작건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전쟁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민의 국가이면서도 인종차별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53]

구체적으로 인종 문제가 사회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이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인종 문제

앵글로-색슨족(Saxons)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 북방계의 이주자들은 이주 시기가 빨랐다는 점도 있어 일찍이 융합하였으며, 현재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9세기 후반 이후 이주한 신이민들은 일반적으로 신참자(新參者)로서 생활의 기반이 약한 데다가 유대인·아시아인 등은 인종·문화가 구(舊)이민과 이질적이어서 동화하기 어려우며, 배척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경향이 있고, 사회생활에서도 차별대우를 받는 일이 있다. 그러나 현재 인종문제로서 최대의 문제는 인구의 1할을 차지하는 흑인의 문제다.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팔려 온 그들은 해방 후 전국 어느 곳에나 거주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일부에선 교육·취직·거주 등의 분야에 불평등한 점이 남아 있고, 이에 항의하는 흑인의 행동도 차츰 격렬해지고 있어, 오늘날 미국 내에서 최대의 사회 문제로 되어 있다. 또한 푸에르토리코인은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에 한정되어 있고 절대수도 많지는 않은데 신이민으로서 흑인과 함께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하는 수가 많다. 그리고 빈곤으로 인해 그들의 생활상태는 차츰 사회문제화되어 가고 있다.

종교

종교구성 (미국)
개신교
  
46.5%
가톨릭
  
20.8%
모르몬교
  
1.6%
그 외 기독교 신도
  
1.7%
유대교
  
1.9%
이슬람교
  
0.9%
힌두교
  
0.7%
불교
  
0.7%
그 외 종교
  
1.8%
무종교
  
22.8%
대답없음
  
0.6%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이민 온 개신교 신자들 즉, 청교도들은 초기에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전통종교를 배격했으며 , 같은 기독교 종파들인 성공회로마 가톨릭교회성공회 기도서 사용 금지, 성공회 신자 추방,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 이민거부로 배척했다. 하지만 건국 후에는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고, 다수의 인종·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라는 미국의 특징상 거의 모든 종류의 종교를 볼 수 있지만, 유럽에서 온 이민이 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주 1회 교회에 가는 사람은 점차 적어지고 있다. 개신교 신자가 다수며 그외 가톨릭교회 및 기타 다양한 종교가 있다. 또한 유대교도도 많아서 이스라엘의 인구보다도 더 많은 유대교도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신앙심도 미국인들은 매우 높아 신 또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 비율이 94%에 달할만큼 기독교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가톨릭교회와 유대인을 공격했던 시기도 있었고, 존 F. 케네디외에는 가톨릭교회 신자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지 않았던것도 이와같은 배경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과 같이 종교나 민족이 미국의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도 적지 않다.

영국 종교개혁으로 성공회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이후, 일부 칼뱅주의자들은 철저한 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전통들을 배척한 성경주의자들로서, 성공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일부 청교도들은 네덜란드와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네덜란드에 이주한 ‘암스테르담 제2 영국교회 분리주의자 형제’들을 후에 침례교 또는 침례교인이라고 불렀다.

미국에 1620년 이주한 이들은 영국 플리머스 항을 떠나 메이플라워호에 탑승했는데, 본래 이들은 버지니아 식민지에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태풍을 만나면서 플리머스 정착지에 이주했다. 이 플리머스 정착지는 메사추세스 식민지에 흡수된다. 후에 이들을 일컬어 '필그림 파더스'라고 하게 되었으며, 종교의 자유를 찾아 개척되었다는 미국의 이미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청교도들에 의해 개척된 기독교 국가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낭만적인 신화라는 설명도 있다. 그 실례로 개혁교회 목사인 마이클 호튼은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나침반)에서 독립혁명으로 미국을 건설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이신론자들이었음을 지적한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개척한 나라로서 초기 청교도 사회에서는 기독교인만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갖고 있었고, 청교도 목사들은 신자의 자녀에게만 세례를 집례했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다소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실제로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前 성공회 사제는 제정분리사상 즉, 종교정치의 분리사상을 주장하여, 1635년 청교도 사회로부터 추방되었다.

로저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도움을 받아 매사추세츠주 남부에 정착하여 프로비던스(Providence, 현재 로드아일랜드)를 건설했다. 프로비던스는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기 때문에, 앤 허친슨처럼 종교적 박해를 받던 사람의 안식처가 되었다. 앤 허친슨은 보스턴 주민이었는데, 창세기아브라함 이야기에 근거,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도행전 18장 26절과 디도에게 보낸 편지 2장 3~5절에 근거, 여성도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 때문에 재판을 받았다. 결국 그녀는 추방명령을 받았고, 프로비던스로 피신했다. 물론 로저는 앤 허친슨의 신앙을 존중하여 그녀를 프로비던스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로저 윌리엄의 종교적 자유 포용은 미국 민주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17세기 청교도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대다수 청교도들은 이것을 사탄의 세력에 의한 것으로 두려워했다. 이것은 1692년 살렘 마녀 사냥으로 폭발하는데, 메사추세스주 살렘에서 일부 시민들이 마녀로 몰려 고문치사 또는 사형당한 사건으로, 50000명 중 1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초기 청교도 사회의 오점 중 하나다.

근대 미국과 유럽교회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영향을 주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근대적 해석으로 기독교와 시대의 연관성을 추구했다.[54] 특히 미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림의 윤리성을 강조한 사회복음주의가 등장하는 등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성향을 보였고, 미국 성공회, 감리교,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었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장로교는 뉴욕 유니온을 중심으로 한 축을 형성하였을 뿐 여전히 정통 칼뱅주의가 주류였다.)[55] 이에 대한 반동으로 미국 보수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The Fundamentalism)를 주장하였다. 근본주의 신학은 일부 감리교회와 극소수의 장로교회(예:칼 매킨타이어)와 절대다수의 침례교회에서 영향력을 보였는데, 1915년 출판된 《근본》이라는 소책자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56]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신성, 예수의 대속적 죽음, 예수의 재림, 축자영감설에 근거한 성경무오설이 근본주의의 교리적인 특징이며, 예수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은 심판으로 멸망한다는 구원관, 음주나 흡연에 반대하는 종교적인 금욕주의,[57] 신학 교육과 자연과학에 대한 거부도 근본주의의 특징이다.[58][59] 이들 근본주의자들은 조선에서의 개신교 선교를 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회는 근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60]

현재 미국에서 가장 압도적인 종교는 기독교이며, 70.6%가 기독교인이다. 이 중에서 개신교 신자는 46.5%며,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오순절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등의 다양한 교파가 있다. 이중 그리스도의 교회는 미국 교회에서 19세기 소위 환원운동이라는 종교운동으로 발생한 자생적인 교파다. 가톨릭교회는 20.8%로 단일 교단으로는 최대 규모다. 미국 정교회는 3%다.[61] 최근 들어 다소 감소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미국에서는 대통령 취임식이나 학교 졸업식에 개신교 목사가 기도를 할 정도로 개신교회의 영향력이 강하다.

한편, 미국 가톨릭교회 내 일부 보수주의 법조계 인사들은 보수 정치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20세기 초에야 차별이 완화된 미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법조계는 유일한 출세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현재 미국 법조계내 보수주의 대변자들은 가톨릭 신자들인데, 2005년 감리교 신자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 존 로버츠를 대법원장으로 지명한 데 이어, 또 다시 보수 가톨릭 신자 새뮤얼 얼리토를 대법관으로 추천하는 등 미국 보수 로마 가톨릭과 보수적 복음주의간의 연대가 시도되고 있다.[62]

그 외 미국 기독교 교파로는 미국 성공회(Episcopal Church of USA, ECUSA)가 있는데, 청교도들이 미국을 개척한 시기에는 성공회 기도서 사용금지, 성공회 신자 추방 등의 탄압을 받았으나, 종교의 자유가 존중되면서 일부 주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63] 현재 미국 성공회 관구장 즉, 미국 성공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는 얼 쇼리 주교(1957년생)다.

정치

미국 의회 의사당 서쪽 정면. 미국 상하원이 이곳에 있다.

미합중국은 1776년 성립되어, 전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연방 국가다. 미국은 "에 의하여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여, 다수결의 원칙을 조정하는" 대의 민주주의 입헌 공화국이다. 미국 정부는 미국 최상위 법전인 헌법에 규정된 견제와 균형 체제에 따라 통제된다. 미국의 연방 제도에서 시민은 보통 세 단계의 정부 즉 연방, 주, 지역 단위에 속한다. 미국 헌법은 연방 정부의 권한에 관한 것을 구성 주에서 위임받았는데, 그 가운데 국방·외교 정책·대외 무역의 조정 기능, 통화, 최고 법 집행기능, 주간 통상의 조정, 이민 등은 연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책임권에 속한다. 주 정부의 주요 기능은 교육, 농업, 자연보호, 고속도로 관리, 차량 감독, 공공안녕, 교도행정, 주내 통상의 조정, 교육·보건·복지 정책의 시행 등이다. 지역 정부의 업무는 보통 각 과 시 정부에 나눠 맡기고 있다. 거의 모든 경우에 행정부와 입법부 공무원은 구역별로 시민의 다수 투표에 따라 선출된다. 연방 차원의 비례대표제는 없으며, 하위 정부 단위에서도 이 제도는 드물다.

백악관 남쪽 정면. 미국 대통령의 관저이다.

미국의 정치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볼 때 특이한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주로 정치제도나 정치행동의 측면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정치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미국인들의 정치적 성향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가브리엘 앨몬드(Gabriel A. Almond)가 지적하였듯이 미국의 정치문화는 동질적이고 세속적이다. 인종의 도가니라고 불리는 미국에서는 인종뿐만 아니라 종교·문화·경제 등에 걸쳐서 차이가 크며 시민의 이해(利害)도 대립하기 쉽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부터 정치의 목표는 항상 현실적이며, 동의에 입각한 이해관계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많은 가치가 복합된 정치문화인 동시에, 합리적이고 타산적이며, 경험적인 정치문화이다. 때문에 미국의 정치무대는 마치 혼잡한 분위기 속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자유시장을 방불케 한다. 미국에서는 자유로운 개인의 정치 참여 원칙이 관철되어 왔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은 3권분립을 엄격히 고수하고, 독립국에 가까운 주(州)제도를 채용하여 지역의 자주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역사적 경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분립된 3권간에는 권력의 중복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정치체제 간에는 행정부·입법부·사법부가 중복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연방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의 정부는 구성주정부가 연방정부에 위임하는 권한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며, 그 외의 권한은 국민과 50개의 주가 보유하고 있다. 50개주는 연방 정부와 마찬가지로 주 정부도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 각부는 연방 정부의 각부와 동등한 기능 및 영역을 지닌다. 각 주의 행정 수반은 주지사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간의 권력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에는 권력 분포와 행사에 있어서 중복현상과 마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세기적인 상황이기는 하지만, 미국도 행정부의 권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미국 정치에서 의회가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은 매우 중요하며, 또한 강력하다. 단지 시대적인 차원에서 행정부의 권한이 강화된 반면, 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을 뿐이다. 미국은 50개주에 포함되지 않는 괌, 북마리아나제도 등의 속령 등 해외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국가 군대 최고 통수권자의 직함을 가지며, 국방 장관과 합동 참모총장을 임명한다. 미국 국방부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을 비롯한 군 전체를 총괄한다. 해안 경비대의 경우 평화시에는 국토안보부에서, 전시에는 미 해군에서 관할한다.

국방

키티호크, 로널드 레이건호, 에이브러햄 링컨호와 해안경비대, 해군, 공군 비행기으로 이루어진 항모타격단.

미국은 세계 군사력 순위 1위 강국이다. 라이벌인 소련과 양자체제를 유지하다가, 소련이 붕괴 되므로 미국은 독자체제로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의 군대 총사령관 지위를 가지고 있고, 국방부 장관미국 합동참모본부를 임명 할 수 있다. 미국 국방부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를 포함한 군대를 통솔한다. 해안경비대는 평상시에는 미국 국토안보부가, 전쟁 상황에는 미 해군에서 통솔한다. 2008년 현역으로 있는 군인이 140만 명을 넘겼다. 예비군과 주방위군까지 합치면 230만 명이 넘는다. 또한 국방부는 계약직을 포함하지 않은 민간인 70만 명을 고용하고있다.[64]

평상시에는 모병제지만, 전시 상황에서는 의무 징병 등록제를 통해 대부분 징병제로 뽑는다.[65] [66] 미국 군대는 공군의 신속한 수송기, 해군의 11대 현역 항공모함, 해병 원정부대 해군 함대사령부와 태평양 함대를 통해 빠르게 투입 할 수도 있다. 또한 해외에 865개의 해외 주둔 기지를 두고있고,[67] 25개 국가에는 미군을 주둔시키고있다.[68] 이러한 세계적 규모의 주둔군은 미국 "제국의 기반"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말한다.[69]

2011년 총 국방비 지출은 7,000억 달러 이상인데, 이는 세계 국방비의 41%며 상위 14개 국가의 국방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치다. 미군 국방비는 GDP 전체의 4.7%로, 상위 15개 국가 중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70] CIA에 따르면 2012년 GDP 대비 미국 국방비 지출은 세계에서 23번째라고한다.[71] 미국 국방비는 냉전 시대 이후 최근 수 십년간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는데, 1953년 전체 GDP의 14.2%, 1954년 연방비 69.5%를 맡은 것에 비해 2011년에는 GDP의 4.7%, 연방비는 18.8%로 감소했다.[72]

2012년 국방비 예산은 2011년보다 4.2% 증가한 5,530억 달러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군사작전때문에 1,180억 달러가 추가되었다.[73] 2011년 12월에는 이라크에 마지막 미군을 보냈다.[74] 이라크 전쟁 중 미군 4,484명이 사망했다.[75] 2012년 4월에는 약 9만 명의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76] 2013년 11월 8일까지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2,285명이 사망했다.[77]

경제

경제 지표
실업률 3.8% 2018년 5월 [78]
GDP 성장률 4.0%2014년 3/4분기 [2.8%2014년] [79]
CPI 인플레이션 2.9% 2011년 2월 ~ 2012년 2월 [80]
공공 채무 17조 2,300억 달러 2014년 7월 [81]
빈곤율 12.7%2016년 [82]
국가 (총 가치) 82조 2,000억 달러2015년 1/41분기 [83]

미국의 경제 체제는 민주주의적 혼합 경제로, 풍부한 천연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기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높은 생산성을 누리고 있다.[84] 미국이 부유한 경제를 이룩한 것은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의 존재와, 기술혁신이 뒷받침된 국내 산업이나 해외에서의 활발한 투자활동으로 대표되는 고도의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것이다.[85]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20조 4128억 달러로, 시장 환율로 세계총생산(GWP)의 23%, 구매력 평가(PPP) 대비 세계총생산의 약 21%를 차지한다고 한다.[4] 미국의 GDP는 세계 최대 규모며, 1인당 명목 GDP 9위, 구매력 평가 1인당 GDP 10위다.[4]

미국은 세계 최대 재화 수입국이며, 수출 규모는 세계 1위인데 1인당 수입액은 비교적 낮다. 주요 무역 상대국으로는 캐나다, 중국, 멕시코, 일본, 독일이 있다.[86] 2007년, 자동차는 주요 수출입 품목이었다.[87] 중국은 미국 공공 채무를 가장 많이 보유한 해외 채권국이다.[88] 약 6년간 성장하던 미국 경제는 2007년 12월부터 침체기를 맞고 있다.[89] 한편 미국은 국제 경쟁력 보고서에서 2위에 등재되었다.[90]

2009년 미국 경제에서 개인 부문은 전체 중 55.3%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연방 정부 활동은 24.1%, 주 및 지역 정부 활동(연방 이전액 포함)은 20.6%를 기록했다.[91] 미국 경제는 탈산업화 단계로, 서비스 부문이 GDP의 67.8%를 차지하지만, 지금도 미국은 산업 강국이다.[92] 기업 총수령액 기준 주요 사업 문야는 도소매 무역이며, 순수입 기준으로는 제조업이 주된 분야다.[93] 화학 공학 제품은 주요 제조업 분야이다.[94] 미국은 세계 3위 석유 생산국이며, 최대 수입국이기도 하다.[95] 미국은 전기 및 핵 에너지를 비롯하여 액화 천연 가스, 황, 인지질, 소금 생산에서 세계 1위다. 농업은 미국 GDP의 1%를 넘지 않으나,[92] 미국은 옥수수[96] 와 콩[97] 의 세계 최대 생산국이다. 뉴욕 증권거래소는 세계에서 달러가 가장 많은 곳이다.[98] 코카콜라, 맥도날드는 세계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가장 높은 기업이다.[99]

2009년 3/4분기에 미국 노동 인구는 1억 5,440만 명이었다. 이 중 고용 인구의 81%가 서비스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2,240만 명을 거느린 미국 정부는 주요 고용처다.[100] 미국 노동자의 노동 조합 조직률은 12% 정도로, 서유럽의 30%에 비하여 낮은 수준이다.[101] 세계 은행은 미국을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가 가장 쉬운 나라 1위로 들었다.[102] 1973년에서 2003년까지 미국인의 연간 평균 노동 시간은 199시간에 이르렀다.[103] 이런 이유도 있어서, 미국은 세계에서 노동 생산성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08년에 미국은 시간당 노동 생산성 면에서 십년 전까지만해도 미국보다 높던 노르웨이,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따라 잡았다.[104] 유럽과 견주어 미국의 자산 및 법인 소득세율은 보통 높은 편이며, 노동 특히 소비세율은 낮다.[105] 미국은 내수경제가 튼실한 국가다. 그렇기 때문에 제조업에서 내수 위주로 산업기반을 바꾸기도 했다. 세계최대 석유 비축량에 셰일 가스까지 보유하고 있다. 최첨단 공산품을 많이 생산하며 정치적으로 소외된 계층이나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 계층이 적고 엘리트 계층이 솔선수범하여 내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영토는 넓고 자원은 풍부하며 새로운 인력이 끊임없이 외부에서 공급된다.

교육

버지니아 대학교, 토머스 제퍼슨이 설계했으며, UNESCO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미국의 교육은 초기 식민지 시절부터 중요시되어왔는데, 고등교육기관의 발전은 전쟁과학 연구 등에 있어 미국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초기에서부터 현재까지 교육에 있어 종교의 영향은 매우 크며, 엘리트들의 국가 경영이 장려되는 사회여서, 사학이 발달했다. 크게 사립과 주립 혹은 국공립 교육기관으로 나뉘며, 대부분의 에서는 6세에서 16세까지 무상·의무 교육을 실시한다. 미국 학생들의 절대 다수가 중등교육을 마치는 17, 18세 (K-12 학제 상 고등학교 졸업반)까지 학교에 다닌다. 부자들은 대체로 사립 학교에 다닌다. 실용적인 교육 철학은 교육의 마지막 기간인 대학교와 대학원의 우수성에서 알 수 있는데, 특히 대학교와 대학원 등 고등교육은 그 명성과 학열, 학생 수준, 그리고 연구 실적에서 세계 여느 나라의 고등교육기관을 압도한다. 미국에서 대학에 진학하려면 ACT(주로 중부 쪽 대학)나 SAT(주로 동부, 서부 쪽 대학)를 치러야 한다. 다른 유럽의 국가들처럼 미국도 중등 교육 단계부터 학점제를 채택한다. 교육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고, 외국어로는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중 하나를 선택한다.

미국에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고등교육기관이 많이 있다. 학문, 연구, 스포츠, 예술 등 각종 분야에서 권위와 영향력이있는 명문 대학교로는 하버드 대학교를 포함하는 아이비리그공립 대학교(퍼블릭 아이비)인 UC 버클리, UCLA, 윌리엄 & 메리 칼리지, 버지니아, 미시간 대학교, 그리고 사립 대학교인 스탠퍼드, 시카고, 워싱턴 세인트루이스MIT가, 미국 남부의 대표적 사립 대학교인 듀크, 밴더빌트, 라이스에모리 대학교 등이 있다.

교통

총 46,876 마일 (75,440 km)의 길이를 자랑하는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시스템 지도.[106]

개인 교통수단 중 가장 많이 차지 하는 것은 자동차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도로망을 가진 나라 중 하나인데 1억 3천 만개의 도로가 펼쳐져있다.[107] 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자동차 시장이며,[108] 미국인 1,000명당 765대의 자동차를 가지고있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자동차 보급율을 기록하고있다.[109] 이러한 개인용 자동차의 40%는 밴, SUV, 소형 트럭이다.[110] 미국인들은 하루 평균 29마일 (47 km)을 다니며 55분을 운전하는데 보낸다.[111]

미국인 전체 출퇴근자의 9%는 매스 트랜싯을 이용한다.[112][113] 철도를 이용한 화물수송은 광범위 한 반면에 여객 철도 이용률은 조금 떨어지는편이다.[114] 하지만 암트랙의 국가 여객 철도 시스템의 이용자 수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37%가 증가했다고한다.[115] 또한 매년 경전철 개발이 증가하고있다.[116]

미국은 국토가 넓은 덕에 항공 산업이 매우 잘 발달되어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3개의 항공사 (아메리칸 항공, 델타 항공, 유나이티드 항공)가 모두 미국에 있으며 2013년 아메리칸 항공US 에어웨이즈와 합병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사가 되었다.[117] 또 세계에서 가장 바쁜 공항 30개 중 미국에서 가장 바쁜 공항인 하츠필드 잭슨 애틀랜타 국제공항을 포함해 16개 공항이 이름을 올렸다.[118]

문화

아메리카 대륙에 신세계를 구축한 개척자들은 엄격한 청교도며 그 금욕사상은 모든 경쟁이나 즐거움을 죄악시하여 종교적인 활동을 제외하고 생산과 결부되지 않은 활동을 부정했다. 따라서 영국에서 도입된 예술·스포츠 문화가 신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개척민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빠르게 미국사회에 동화되었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 다방면에서 미국적인 사고와 양식이 표출되었으며, 특히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대중음악과 영화를 들 수 있다.

대중 매체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할리우드 사인.

세계 최초의 상업적 그림 전람회는 1894년 토마스 에디슨키네토스코프를 사용해 뉴욕에서 열렸다. 다음 해 뉴욕에서 최초로 상업적인 영화 상영이 이루어졌고, 미국은 이후 수 십년 동안 유성 영화의 성장에 힘썼고 영화에 있어서는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 20세기 초반 이후 미국의 영화 산업은 캘리포니아 주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감독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는 영화 기법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1941)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대표적인 예다.[119][120] 존 웨인마릴린 먼로는 미국 영화 배우의 상징이며, 제작가/사업가 월트 디즈니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영화 캐릭터를 상품화 시킨 장본인이다. 할리우드는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지 중 한 곳이다.[121]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청자들을 보유한 곳이고,[122] 평균 일간 시청 시간은 2006년 다섯 시간으로 기록된 이후 계속해서 증가하고있다.[123] 네 개의 주요 방송 텔레비전 네트워크는 모두 상업적인 독립체다. 미국인들은 하루 평균 2시간 30분 정도 라디오 프로그램을 청취할 정도로 크게 대중화되어 있다.[124] 포털 사이트웹 검색 엔진 이외에 페이스북, 유튜브, 위키백과, 블로거, 이베이, 크레이그리스트는 매우 유명한 웹사이트들이다.[125]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리듬과 가사 스타일은 유럽의 전통 음악과 다르게 미국 음악의 많은 부분에 있어 깊게 영향을 끼쳤다. 블루스와 같이 포크의 한 요소로 은어로만 알려져있던 장르는 요즘에 옛날 음악의 일종으로 인식되면서 세계적인 인기 있는 장르로 변했다. 재즈는 20세기 초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과 같은 사람들이 도입해 발전시켰다. 컨트리 음악은 1920년대 발전되었고, 리듬 앤 블루스는 1940년대에 발전되었다.[126]

엘비스 프레슬리척 베리는 1950년대 중반 락앤롤 장르를 대중화시켰다. 1960년대에는 밥 딜런은 포크 장르의 부흥과 함께 미국의 가장 유명한 작곡가 중 한 명이었던 제임스 브라운과 함께 펑크를 발전시켰다. 최근 미국 음악계는 힙합하우스 음악이 많이 창작되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마돈나와 같은 미국의 팝 스타는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126]

문학, 철학, 예술

미국의 유명한 작가 마크 트웨인.

역사를 통틀어 미국은 일단의 뛰어난 작가들을 배출했다. 코튼 매더와 조내선 에드워즈의 설교집에서부터 벤저민 프랭클린과 토머스 제퍼슨의 불후의 저작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시대와 건국 초기시대가 미국 문학 속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19세기 문학은 너새니얼 호손, 허먼 멜빌, 에밀리 디킨슨, 에드거 앨런 포, 월트 휘트먼, 마크 트웨인, 헨리 제임스 등과 같은 작가들로 대변되었다. 20세기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존 스타인벡, H. L. 멘켄, F. 스콧 피츠제럴드, 노먼 메일러, 솔 벨로, 존 업다이크 등의 작가들이 이름을 떨쳤다. 희곡 작가로는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시인으로는 에즈라 파운드, T. S. 엘리엇, 로버트 프로스트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흑인 문학으로는 랠프 엘리슨의 《투명 인간》 (Invisible Man, 1952년)이 20세기 미국 소설 가운데 불후의 명작으로 남았다. 보다 최근에는 여성운동이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면서 토니 모리슨, 앤 타일러, 루이즈 에드리히 등의 작품이 애독되었으며 여성 소설의 급속한 팽창을 경험했다.

건축 분야의 경우, 스칸디나비아에서 전해진 통나무집은 신속하게 보급되어 숲이 우거진 프런티어 지역의 상징적인 주택이 되었다. 연방양식, 그리스 부흥 양식, 고딕 양식 등 보다 정교한 건축양식이 19세기에 도시와 시골의 건축물에 이용되었다.

도시들이 소위 황금시대(Golden Age)로 접어들면서 마천루가 등장해 미국 사회의 기술적 업적과 자신감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윌리엄 러 배런 제니와 루이스 설리번은 시카고 출신의 건축가로, 그러한 건축양식의 선구자들이다. 설리번의 제자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9~1959)는 프레리 학파(Prairie School)로 알려진 새로운 건축설계운동을 시작해 20세기초에 미국 전역에 걸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후대의 주요 미국건축가로는 독일 태생의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르 로어, 그의 제자들인 필립 존슨, 로버트 벤투리 등이 있다. 1825~1870년에 유행했으며 황야 그 자체를 소재로 삼았던 허드슨 강파(Hudson River School)는 미국 미술에서 일어난 최초의 토착화 운동으로 여겨진다. 아셔 B. 듀랜드가 그 대표적인 화가다. 도시생활은 에드워드 호퍼 같은 사실주의파나 스튜어트 데이비스 같은 추상파 화가를 막론하고 20세기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20세기 중엽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로 알려진 미국의 회화양식이 결과적으로 서양미술을 압도하게 되었다. 중심인물은 잭슨 폴럭과 로버트 머더웰 등이었다. 추상표현주의의 위세도 1960년대에 또다른 미국적 양식인 팝 아트(Pop Art)의 등장으로 쇠퇴했다. 앤디 워홀과 로버트 라우셴버그 등의 팝 아티스트들은 대중문화와 상업에서 자유롭게 소재를 선택했다.

종종 조각의 발전은 회화의 발전과 병행되는 경우가 있는데, 루이즈 니벌슨과 마크 디 주베로의 추상화와 클래스 올덴버그의 팝 아트 조각이 바로 그 예다. 다양한 양식과 경향과는 대조를 이루는 특이한 예술가들이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미국 예술의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다. 고립상태에서 제작된 그들의 작품들은 국가적 경험에서 발견된 본질적인 것을 표현한다. 19세기의 윈즐로 호머와 20세기의 조지아 오키페 등의 화가들이 그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미국인은 과소비성 소비행태로 알려져있으나, 사실은 소비 행동이 절약적으로, 소량 구매, 쿠폰의 생활화가 되어 있다. 창고 세일, 일회용 상품, 패스트 푸드의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소비 생활의 흐름은 전문 유통 업체가 증가하고, 쇼핑몰이 대형화되고, 소비자의 안목이 고급화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가 많은 나라이고 전체적인 국민 소득 수준이 높은 관계에다 자유롭고 소비를 조장하는 문화 등의 이유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치품을 구입하는 나라며, 각종 자원들을 엄청난 양으로 소비하는 나라다.[127] 일부 특권층의 과소비가 악명 높으며, 중산층 역시 소비생활을 즐기는 문화 속에 살며,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지는 추세다.

음식

미국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물과 애플파이.

주류 미국 요리는 다른 서양 나라들과 비슷하다. 밀은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곡물이다. 북미 원주민과 초기 유럽 이주민들은 전통적인 미국 요리에 칠면조, 사슴고기, 감자, 고구마, 옥수수, 호박, 메이플 시럽과 같은 원산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조리하는 돼지고기와 소고기 바베큐, 크랩 케이크, 초콜릿 칩 쿠키는 독특한 미국 요리들이다. 아프리카 노예들에 의해 만들어진 솔 푸드는 남부를 중심으로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인기를 얻고있다. 루이지애나 크리올요리, 케이준 요리, 텍스 멕스와 같은 싱크리티즘 요리는 지방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애플파이, 프라이드치킨, 피자, 햄버거, 핫도그와 같은 미국 특유의 음식은 다양한 이민자들의 레시피가 섞이면서 생겨났다. 프랑스식 감자튀김, 부리토(Burrito)와 타코와 같은 멕시코 요리, 이탈리아에서 전해지면서 미국식으로 변형된 파스타 요리는 널리 퍼져있다.[128] 미국인들은 보통 차보다 커피를 좋아한다. 미국의 기업들에 의한 마케팅은 아침 식사와 함께 오렌지 주스 또는 우유를 마시는 것이 흔한 모습이 되는데 큰 원인이 되었다.[129][130]

미국의 패스트푸드 시장은 세계에서 제일 큰데, 1930년대 드라이브 스루 형식을 만들어냈다. 패스트푸드의 소비는 건강에 대한 우려를 촉발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인들의 열량 섭취량은 24%가 증가했고,[128]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자주 식사하는 것에 관련해 미국 공중 위생 관리는 "비만 유행성"이라고 부른다.[131] 높은 당이 들은 청량음료는 널리 인기를 얻고있는데, 이러한 설탕이 첨가된 음료는 미국인들의 칼로리 섭취량 9%를 차지하고있다.[132]

스포츠

미국에서 매년 열리는 화려한 스포츠 행사들로는 프로 야구월드시리즈, 대학 미식축구의 각종 볼(로즈볼), 프로 미식축구의 슈퍼볼, 미국 프로 농구협회(NBA)의 플레이오프전, 프로 아이스하키스탠리컵 대회, 미국 오픈 테니스 선수권 대회, 미국 프로골프인 협회 선수권 대회 등이 있다. 인디애나폴리스 500마일 경주, 켄터키 더비, 프리크니스 스테이크스, 벨몬트 스테이크스, 서러브레드 경마, 프로 복싱 선수권대회 등도 세계적인 관심을 끈다.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미식축구, 야구, 농구, 하키, 골프, 테니스, 아이스하키 등이며 가라테를 포함하는 마셜아츠, 레슬링, 모토스포츠 등도 대중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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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피디아

 

아이슬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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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란드 공화국
Lýðveldið Ísland
Flag of Iceland.svg Coat of arms of Iceland.svg
국기 국장
표어 (없음)
국가 찬가
Iceland on the globe (Greenland centered).svg
수도 레이캬비크 북위 64° 08′ 00″ 서경 21° 56′ 00″ / 북위 64.133333° 서경 21.933333° / 64.133333; -21.933333
정치
공용어 아이슬란드어
정치체제 공화제, 입헌제, 민주제, 단일제, 내각제
대통령
총리
그뷔드니 소를라시위스 요한네손
카트린 야콥스도티르
역사
독립 덴마크로부터 독립
 • 독립 1918년 12월 1일
지리
면적 103,000km2 (107 위)
내수면 비율 2.7%
시간대 GMT (UTC+0)
DST (없음)
인구
2015년 어림 329,040명 (182위)
인구 밀도 2.89명/km2 (188위)
경제
GDP(PPP) 2005년 어림값
 • 전체 $102.6억 (139위)
 • 일인당 $34,600 (11위)
HDI 0.906 (13위, 2012년 조사)
통화 크로나 (ISK)
기타
ISO 3166-1 352, IS, ISL
도메인 .is
국제 전화 +354

덴마크-아이슬란드 동군연합이었다.

아이슬란드의 지도

아이슬란드 공화국(아이슬란드어: Lýðveldið Ísland 리드벨디드 이슬란드) 줄여서 아이슬란드(아이슬란드어: Ísland 이슬란드, 문화어: 이슬란드)는 북대서양에 위치한 섬나라이다. 그린란드의 남동쪽, 영국덴마크의 자치령인 페로 제도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도는 레이캬비크이다. 대서양 중앙 해령의 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슬란드는 화산 활동이 활발하며, 지열의 작용도 거대한 규모로 이뤄진다. 또한 북극권 바로 아래에 국토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수목의 생장에 제한을 받으며 빙하의 흐름도 활발하다. 이런 지질학적 특징은, 아이슬란드의 풍경을 다채롭게 만들었다. 황무지와 고원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화산활동으로 높이 솟은 산들 사이로 형성된 거대한 빙하퇴가 바다를 향해 저지대로 흘러내린다. 멕시코 만류에 의해 위도에 비해 따뜻하고 추운 기온이다.

역사[편집]

원래는 무인도였으며, 874년 노르웨이 사람 잉골프 아르나르손이 기록된 첫 정착민이다. 930년 아이슬란드 자유국의 형성과 함께 의회가 생겼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 민주주의로 여겨지기도 한다.[1] 1262년에 정식 노르웨이령이 되었다가, 1380년 덴마크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1814년에 다시 킬 조약으로 덴마크령이 되었다. 1904년에는 자치가 인정되어, 1918년 12월 1일에 덴마크 국왕과의 동군연합으로 정식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인 1940년 4월 9일에 나치 독일에 의해 본국인 덴마크가 점령당하고 항복함으로써, 동군연합은 강제로 해체되었다. 한편 영국은 같은해 5월 10일에 독일의 북대서양 진출을 차단하고 영연방국인 캐나다와, 향후 동맹을 고려 중인 미국과의 안정적인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중립국인 아이슬란드를 침공해 점령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는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연합국 편에 서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그 후, 1944년 6월 17일부터 지금까지 공화국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리구[편집]

기후[편집]

아이슬란드의 기후는 다소 찬 해양성 기후이다. 하지만 따뜻한 북대서양 해류가 흐르기 때문에 매우 높은 위도에 위치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따뜻하다. 겨울은 바람이 불지만 따뜻하며 여름은 다소 건조하고 시원하다. 알래스카 반도와 얄루산 열도와 기후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북극과 거의 근접하지만 겨울에도 아이슬란드의 항구는 거의 얼지 않는다. 얼음이 어는 경우는 거의 없고 북쪽 해안에서 1969년 일어난 이후 이제껏 없었다.

남쪽 해안은 습윤하고 따뜻하며 바람도 많이 분다. 좀 더 고도가 낮은 내륙 지방은 북쪽 지방으로서 가장 건조한 지방이며 남부보다 눈이 더 많이 내린다. 중앙 고지가 가장 추운 곳이다.

1939년 6월 22일 30.5도의 최고 기온이 관측되었으며 가장 낮은 기온은 1918년 1월 22일 섭씨 영하 38도이였다.

월평균 최저 기온 및 최고 기온(°C) (1961–1990)[2]
위치 1 2 3 4 5 6 7 8 9 10 11 12 연간l
레이캬비크[3] 1.9 2.8 3.2 5.7 9.4 11.7 13.3 13.0 10.1 6.8 3.4 2.2 최고 7.0
-3.0 -2.1 -2.0 0.4 3.6 6.7 8.3 7.9 5.0 2.2 -1.3 -2.8 최저 1.9
아쿠레이리[4] 0.9 1.7 2.1 5.4 9.5 13.2 14.5 13.9 9.9 5.9 2.6 1.3 최고 6.7
-5.5 -4.7 -4.2 -1.5 2.3 6.0 7.5 7.1 3.5 0.4 -3.5 -5.1 최저 0.2

행정 구역[편집]

아이슬란드의 행정 구역

다음은 아이슬란드의 8개 지역이다(괄호안은 중심도시, 면적(km2), 2007년 현재 인구, 인구밀도)

주민[편집]

스칸디나비아 반도노르드인브리튼 섬아일랜드켈트족 등의 기원을 갖는 아이슬란드인이 주로 거주한다. 아이슬란드는 지역적으로 고립된 섬으로 최근 100년은 몇 안 되는 이민과 세대에 의한 인구 증가가 있을 뿐이었다.

언어[편집]

언어는 아이슬란드어가 사용되지만, 영어덴마크어는 초등학교에서 배우기 때문에 국민의 대부분은 다언어 사용자이다. 또 문해율이 99%이다.

종교[편집]

2013년 1월 조사에 따르면 아이슬란드인의 76.18%가 루터교 종파인 아이슬란드 교회(Hin evangeliska lúterska kirkja)에 소속되어 있다. 11.33%는 다른 기독교 종파에 소속되어 있다. 그밖에 게르만 신이교주의, 불교, 이슬람교, 바하이교 등이 존재한다. 2011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아이슬란드인의 60%가 종교가 일상생활에 중요하지 않다고 답변하였다.

종교구성(아이슬란드) ...
루터교
  
76.18%
다른 기독교 종파
  
11.33%
다른 종교
  
12.49%

국방[편집]

레이캬비크의 아이슬란드 해안경비정

아이슬란드의 국방은 아이슬란드 영해와 영공을 지키는 “아이슬란드 해안경비대”와 국가 안보 및 특수 부대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슬란드는 NATO 가입 국가들 중 유일하게 상비군을 유지하지 않는 국가이다. 아이슬란드 해안 경비대는 세 척의 전함과 네 기의 수송기 및 소규모 무장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시에 해양 방어 체계와 대공 방어가 가능한 무기 체계를 갖추고 있다. 아이슬란드 해안 경비대는 “아이슬란드 영공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이는 이전의 해체된 국방 부서 중 아이슬란드 우주항공 부서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위원회에 귀속된 단체들 또한 아이슬란드의 국방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들 중 가장 중요한 부서는 첩보 활동을 관장하고 Víkingasveitin라는 특수 부대가 소속된 국가 안보 조직이다. Víkingasveitin의 구성원들은 고도로 훈련되었으며 대 테러 작전에 응할 수 있도록 무장된 국가 경찰력의 일부이다. 추가적으로 아이슬란드는 위기대응전담반(ICRU)을 운영하고 있다. 위기대응전담반은 아이슬란드 외교부에 의해 관할 및 운영되고 있다. 주 활동으로는 평화유지군의 역할을 부여받고, 2008년부터 비무장 군대로서 특별한 상황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배치되고 있다.

미국과의 방위조약을 체결한 아이슬란드는 케플라비크에 해양항공 군사기지를 동시 운영하고 있다. 더불어 노르웨이, 덴마크 그리고 몇몇 NATO 소속의 가입 국가들과도 군사 및 안보 작전과 관련된 조약을 맺고 운영하고 있다. 아이슬란드는 Northern Viking이라고 불리는 NATO 정기적 훈련을 개최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훈련은 2011년에 열렸으며, 뿐만 아니라 “Northern Challenge”라고 불리는 EOD 훈련도 개최하였다. 1997년에는 처음으로 “협동 안전보장”이라는 구호를 내세운 평화를 위한 협동 훈련(PfP)가 개최되었으며, 이 훈련에는 러시아도 참가하였다. 2000년에도 PfP는 아이슬란드에서 개최되었다. 아이슬란드는 ICRU 평화유지기여국으로 SFOR, KFOR 그리고 ISAF에도 참여하고 있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재정적인 측면에 있어서 NATO의 국제적 활동과 계획을 뒤받침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1987년 6월 아이슬란드의 수도인 레이캬비크에서는 NATO 구성 국가의 외교부 장관 모임이 열리기도 했다. 추가적으로 노르웨이 정부는 아이슬란드 국민들이 노르웨이의 국민이 받을 수 있는 군사훈련을 노르웨이에서 받을 수 있는 권한을 승인하였다. 이 교육을 받은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노르웨이 국방부 소속의 직업군인으로 활동할 수 있다.

문화[편집]

[편집]

아이슬란드에는 책을 쓰는 사람도 많고 독서량도 많다.[5] 출간되는 책의 수는 1천 명당 2.8권으로 독일 0.8권, 영국 0.6권, 미국 0.4권에 비해 휠씬 높은 수치이다.

요리[편집]

Thorramatur.jpg

대부분의 아이슬란드 요리는 생선, 양고기 및 유제품을 기본으로 한다. 섬의 기후로 인해 과일과 채소는 전통적인 요리의 구성 요소가 아니지만, 온실 사용으로 인해 현대 음식에서 더욱 흔하게 나타난다.

스포츠[편집]

Iceland's Olympic Handball Team, Beijing 2008.jpg

아이슬란드는 한대기후로 겨울 스포츠 조건에 유리하다. 축구의 인기가 높으며, 유로 2016에는 첫 출전에 8강까지 올랐다.

경제[편집]

Akureyri.JPG

아이슬란드는 원래 경제력이 높은 나라 중 하나였으나, 최근에 금융위기를 겪었다.[6] 하지만 금융위기가 아이슬란드를 물가가 비싼 나라에서 관광하기에 편한 나라라는 이미지로 바꾸어 놓고 있다. [7]그러나 2009년 1월 28일 결국 아이슬란드 정부는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와 반정부 시위로 붕괴되었고, 이중고를 겪게 되었다.[8]

대외 관계[편집]

Nordic ministers whitehouse 2016.jpg

아이슬란드는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국가와 외교 및 무역 관계를 가지는데, 북유럽 국가들, 독일, 미국, 기타 NATO 국가들과 유대가 특히 강하다. 아이슬란드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대한민국과는 1962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3년에 수교하였다. 노르웨이 주재 한국대사관이 아이슬란드 대사 업무를 겸임하며, 아이슬란드도 중국 주재 대사관을 통해 대한민국 대사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일본은 대량의 캐플린(Capelin; 바다빙어과의 바닷물고기)을 아이슬란드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출처[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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